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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정 Dec 17. 2024

그리고 노래방 도우미 생활

차에서 떨어지고 다리를 다친 게 꽤 오래갔다.

약 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려 다리가 나았다.


모아둔 돈으로 뭐라도 배워 야지 안 되겠다 생각했다.

어릴 때 머리를 다듬으러 자주 다니던 미용실에서 선생님들이 나를 보면 하는 말들이 있었다.


하고 다니는 게 센스가 있네 너 미용 배우면 잘하겠다.

그래서 미용 기술을 배워야겠다 생각하고 바로 미용학 원에 등록했다. 손재주가 좋아서 금방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사이 다리는 다 나았다.


다리가 회복되고 나서 학원 원장님의 추천으로 복지가 좋은 대형 미용실에 취업을 했다. 미용실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미용실 스텝이 해야 했던 많은 일들과 그에 비해 얼마 안 되는 월급은 혼자 살고 있는 엄마까지 도와드리며 생활하기에 너무 힘들고 부족했다.


그 당시 미용스텝들이 기본월급으로 보통 30만 원정 도 받았었는데 나는 학원 원장님 소개로 75 만원 정도 받고 취업을 했다. 다방에선 그보다 몇 배나 더 돈을 받고 일해본 나에겐 흙 집에서 벗어나 혼자 사는 지하 단칸방 월세를 내고 엄마를 도와주며 살기 에 빠듯한 정도가 아니라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구인광고 신문에서 우연히 노래방 도우미 광고를 보게 됐다. 시간당 시급 2만 원이라고 쓰여있었다.

남자를 상대로 한번 일해본 나는 두려움이 별로 없었다. 짙은 화장과 화려한 옷 높은 킬 힐을 신고 밤이 되자 당장에 노래방에 찾아갔다.

그때는 몰랐다. 그래봤자 20살 어린 나이가 가려지지 않는다는 걸......


한껏 성숙해 보이려는 어색한 치장을 마치고 용기를 내어 처음 찾아간 노래방은 1종 허가 업소로 술을 팔고

아가씨 접대가 가능했던 곳이었다.

어두운 조명의 작은 룸 안엔 노래방 기계와 방 한가운 데 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양 옆으로 소파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인상이 썩 좋아 보이지 않은 아저씨와 간단한 면접을 보고 다른 아가씨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엔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여러 명의 아가씨들이 있었다. 새로 온 아가씨라면 함께 잘 지내라고 소개를 시켜주고 남자는 나갔다. 이곳에 모인 여자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모습으로 모여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그 여자들 틈에 낯선 긴장감과 기죽어 보이는 게 싫기도 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괜한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피워댔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나니 긴장감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준 사람이 있었 다.


짧은 단발머리에 입술이 아주 얇아 보였는데 빨간 립스틱을 발라 얇은 입술이 더 돋보였다.

그리고 앳된 얼굴에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게 매력적 이였던 그 사람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침 나와 동갑이었고 말이 잘 통하고 성격이 밝아 보였다.

아는 사람 없는 그곳에서 나는 그 친구에게 금방 마음을 열게 되었다.


노래방에서 처음 일해보니 많이 어색하다고 잘 부탁한 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잠시 뒤 웨이터가 우리가 모여 있는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다른 아가씨들과 함께 이름이 불렸다.


나는 "경아"라는 가명을 썼고 그렇게 그 동갑의 친구와 몇몇 언니들과 손님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는 룸 앞에 차례로 서있었고 곧이어 웨이터는 문을였었다. 아까 면접을 보던 방보다 훨씬 커다란 방에는 여러 명 의 남자들이 앉아 있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친구 사이는 아닌 듯 보였고 회사에서 단체로 남자들끼리 회식을 온 듯 보였다. 이곳에서는 맘에 드는 여자를 자기 옆에 선택해 앉히는데 선택받지 못하면 일명 "뺀 지"를 먹었다고 했다.

남자들은 맘에 드는 여자들을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나도 그중 무리들에 휩쓸려 어느 남자 옆 자리에 착석했고, 다행히 우리 중에 뺀 지는 없었다.


나는 분위기를 살펴보며 긴장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룸 안에 분위기는 편안했고,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피워대는 담배연기에 어두운 방안이 가뜩이나 뿌옇게 보였다. 처음에 들어가 어색하고 낯선 긴장감과는 다르게 함께 들어간 언니들의 도움으로 쉽게 어울려갔다. 마치 나이트에서 부 킹으로 만난 사람이다 생각하니 마 음이 더 편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나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탬버린을 흔들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고 그 가운데 나도 어정쩡하게 박수를 치며 몸을 흔들었다.

순간 누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오빠 그러지 마 그 아가씨 오늘 처음 나왔어 겁먹겠다 ~~ 아가씨 울겠어 그냥 내려줘~"


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고 곧바로 나는 또 다른 남자 두 팔에 던져졌다. 그들은 깔깔 깔 웃으며 나를 이리저리 던져 댔다. 나는 떨어질까 바 무서워 낯선 남자들의 뒷목을 꽉 잡 앗다.


순간 서러움에 눈물이 날 거 같았지만 꾹 참았다.

이 남자들은 내가 여기 처음 나왔다는 걸 말하지 않아 도 알고 있었고 어리숙하게 보이는 나를 그들은 갖고 놀았다. 신고식 같은 거랄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계속 노래방으로 출근을 했고 적응력 빠른 나는 그곳에서도 적응을 잘해갔다.

나는 노래를 제법 잘했는데 중 고등학교시절 학교 축제가 있거나 음악 시간엔 항상 노래로 주목받았다.

한때 꿈이 가수였던 적도 있었을 만큼 노래를 좋아했다. 그때 유행하던 가수 마야의 '진달래 꽃' 노래가 내가 즐 겨 부르던 노래 중 하나였는데 그 노래를 듣고 싶어 나를 찾는 남자들도 종종 있었다.


작고 마른 체구에 허스키하고 시원시원한 커다란 목소 리가 나의 반전 매력이었다. 나는 마음이 잘 맞는 몇몇의 언니들과 금방 친해졌다. 서로의 삶을 나누며 공감하고 의지 했다. 일이 끝나 새벽 4-5시쯤이면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마지 막에 들리던 해장국집에서 우리는 그제야 퇴근 후 힘들었던 지난밤 시간들을 마무리하며 소주잔을 기울였고 서로의 힘겨운 삶을 위로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때 술 한잔 하며 피우던 담배 맛은 여전히 잊히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대기실에 앉아 비슷한 팔자를 가진 사람들이

제 각각의 모습으로 자기 이름이 불리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내 이름 "경아" 하고 불렀다. 그 소리에 일어나 대기실에서 나와 웨이터를 따라 손님 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 두 명이 와 있었는데 딱 봐도 보통 놈들이 아닌

느 낌이 들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나에게 잠시 웨이터를 불러달라

고 했다. 그건 다른 아가씨로 교체해 달라는 "뺀 지"였다. 잠시 뒤 다른 언니들이 불려 나갔다가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새 끼들 참 유난 떠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내 이름이 불렸다.

"경아 다시 나와"

"삼촌 방금 나 뺀 지 논 데는 안 들어가 기분 나빠 다른 언니 보내!"

그 말을 하고 나는 끝까지 대기실에 남아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몇 번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하며 내 인생에 서 가장 더러운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언니도 들어와 각각 남자들 옆에 앉았다.


그들은 사실 서울에서 똑같은 업종을 운영하는데 아가 씨들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가게 저 가게 아가씨들을 둘러보고 다니는 중인데 오늘 여기 가게 아가씨들 얼굴도 전부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핑계 같은 소릴 했다. 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두어 시간만 시간을 떼 우면 되지 하고 참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제안을 했다.

서울에서 같이 일하자는 거였는데 조건이 좋았다.

출근해서 일을 못해도 두 시간 일한 만큼의 일 비를 지 급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밤에 일하는 유흥업소 일이 돈을 쉽게 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술 취한 낯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낮과 밤이 바 뀐 생활과 술 담배에 찌들어 있다 보면 몸과 정신은 서 서히 망가져 간다. 자신들이 선택한 거지 누가 그런데 서 일하라고 강요했 냐 할 수 도 있지만, 내가 그 삶을 살아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걸 뭐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삶의 아픔이 있고 그들도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고 삶을 버텨가는 중이다.


당시 그 제안은 내 마음을 움직였다.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준다니...... 당연히 움직여질 수밖에 없었다.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늪 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 들을 따라 서울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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