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전쟁터

가족이 되어가는 길

by 은나무


며칠 사이에 집 안의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게 변해 있었다.


아침이면 현수의 발자국 소리가 먼저 들리고 뒤이어 시어머니의 발걸음이 따라왔다.

시어머니는 손에 반찬통을 들고 예고 없이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냉장고를 열어 냉장고 칸칸을 살펴보곤 했다.

“이 반찬은 너무 짜다, 이래서 애 입맛에 맞겠냐”는 말이 익숙한 배경음악처럼 흘렀다.


그 말들이 바깥의 소음처럼 작게 울릴 때마다 수연의 어깨는 조금씩 조여졌다. 초반엔 “네가 힘들까 봐”라는 따뜻한 말로 시작했지만 그 말들은 점점 지시와 평가로 굳어졌다.


시어머니는 칭찬 대신에 잘못을 먼저 찾는 눈길을 보냈다. 수연이 식탁에 반찬을 내면 시어머니는 포크 하나를 들어 살짝 맛을 보고는 “이건 현수 친엄마가 해 주던 방식이 더 좋았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 한마디가 칼날처럼 박혀 들어왔다.


현수의 행동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살 다운 장난과 어른들이 읽어내는 ‘의도’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는 아이였다.

엄마(전처)가 떠난 뒤로 아이는 어른들의 반응을 관찰하는 법을 배웠다. 누군가 자신의 행동에 즉시 반응하면 그 행동을 반복했고 반응이 크면 더 과장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함께하는 저녁식사 시간에 현수는 일부러 국을 쏟았다. 수연이 놀라서 달려가자 시어머니는 “이거 봐. 아가씨가 애를 안 낳아보고 덜렁 엄마노릇을 하려니 아이하나 감당 못 하니 쯧” 하고 수연을 책망했다.


그럴 때 현수는 울음을 터뜨리며 시야를 장악했고 시어머니의 어깨에 파고들었다.

그 장면을 본 진우는 당황했고 반사적으로 아들의 편을 들었다. “현수야 괜찮아, 괜찮아. 다음엔 조심하자.”

그 말은 수연에게 ‘네가 먼저 미안해하라’는 무언의 주문처럼 들렸다.


또 다른 날에는 현수가 장난감 칼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이모가 내 장난감을 뺏어갔어!”

시어머니는 즉시 현수를 감싸 안았고 수연은 상황을 바로잡으려 애썼지만 목소리가 작아졌다.

“현수야, 장난감은 놀고 난 뒤에 제자리에 두는 거야.” 수연의 말은 훈육의 말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애들이 다 그렇지. 수연이 너는 현수한테 너무 엄격하게 굴어. 진우야 수연이가 아이를 안 낳아 봐서 모를 거다. 아이를 자유롭게 키워도 된다. 나도 너희들 다 그렇게 키웠다며 진우에게 일러주었다. 그 순간 진우는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렸고 결국 “엄마, 그만 좀 해”라는 중간의 말로 상황을 흐지부지 넘겼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생긴 건 ‘작은 증거’들의 축적이었다. 시어머니는 현수의 우는 장면, 엉뚱한 발언, 그리고 수연의 즉흥적인 단호함을 모아 ‘수연은 아직 현수 엄마 역할에 맞지 않다’는 내러티브를 만들었다.


집안의 작은 물건 하나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현수가 유치원에서 받아온 상장을 현수 방에 붙여두었더니 시어머니는 거실로 갖고 나오시며

“이 상장 붙이는 위치도 내가 정해야 하나”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사소한 장면들이 모여 수연은 자신이

이 집의 ‘임시 거주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됐다.


진우와의 마찰은 점점 잦아졌다.

진우는 처음엔 수연의 입장을 이해하려 애썼지만 현실은 복잡했다. 어머니를 ‘거절’하는 일이 그의 마음에 죄책감을 만들었고 아들의 편을 드는 것은 아버지로서 본능이었다.


어느 날 밤.

수연은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렸다.

식탁 위에 놓인 몇 개의 반찬통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집은 내가 들어온 뒤로도 계속 당신 엄마의 집 같아. 당신 엄마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고 어머니의 방식이 기준처럼 남아 있어. 내가 뭔가를 바꾸려 하면 어머니가 오셔서 다 어머니 마음대로 돌려버려. 나는 이 집에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해?”


진우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수연아, 엄마는 본인이 살아오며 자식을 키운 방식이 몸에 배어 있어. 그걸 바꾸라고 하는 건 쉽지 않아. 근데 당신이 느끼는 기분은 이해해. 나도… 나도 잘 알고 있어. 우리가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해 나가자.”

그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피곤하고 현실적인 무게가 묻어 있었다. 말로는 ‘해결하겠다’고 해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다.


반면 시어머니의 반응은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내가 도와주는 게 무슨 잘못이니. 내가 아니면 너희를 누가 돕겠니. 수연이는 늘 혼자 살아와서 아이 키우는 일도 살림을 하는 것도 서툴 테니 내가 좀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니 서운하구나.”

진우의 엄마는 도움과 간섭의 경계를 인정하지 못했고 자신이 가진 경험과 권위를 곧바로 제시했다.


그 말은 수연에게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이 여전히 이 집의 기준을 좌우한다’는 위협처럼 들렸다. 수연은 그저 아이를 돌보고 진우를 챙기는 이 집 가정 도우미처럼 느껴졌다.


또 현수의 문제 행동은 단순한 짓궂음이 아니었다.

수연은 현수를 데리고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았다.

전문가가 보기엔 ‘주의와 확인을 얻으려는 전략’이 섞여 있다고 했다. 아이는 어른들 사이의 긴장감을 캡처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려고 한다고 했다.


수연이 단호할수록 아이는 더 크게 울고 시어머니는 그 울음을 ‘증거’로 수연을 다그쳤다.

진우는 그사이 갈등을 줄이고 싶어 했지만 때때로 회피하는 일은 더 큰 오해를 낳았다.


어느 주말.

수연은 아이와 있는 시간을 보내려 애썼다.

간단한 쿠키를 굽고 현수가 좋아하는 스티커를 붙이며 놀아주고 있었다. 손에 묻은 밀가루 냄새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 작게 주고받는 웃음들 그것들이 수연에게는 위로였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던 시어머니가

수연에게 말했다.

“아이에게 단 것을 너무 많이 주면 안 된다”라며 지적했다.


수연은 잠시 굳어졌다.

어머니 저는 현수와 함께 하려고 제가 선택한 방법이에요. 사소한 것들이지만 저는 이런 놀이도 하며 아이와 함께하고 싶어요.” 수연의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은 단호함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가 큰 계기가 됐다.

진우는 결국 엄마와 진지하게 마주 앉았다.

진우는 말했다.

“엄마, 우리 집은 이제 우리 셋이 함께 사는 집이에요. 엄마가 자주 오셔서 도와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그 방법이 우리를 흔들고 있어요. 엄마가 오실 때는 미리 알려주시면 좋겠고, 집안일은 저희들이 합의해서 정하고 싶어요.”

그의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강했다.

그녀는 진우의 말을 듣고 처음엔 거부했지만 아들의 단호한 이야기를 듣고 천천히 물러섰다. 완전한 양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대화’의 문은 막히지 않았다.


수연은 그 밤에 눈물을 흘렸다.

슬픔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남편이 그녀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주었고 그것이 큰 힘이 되었다.


다음 날부터 집 안은 조금씩 달라졌다.

시어머니는 방문 시간을 미리 말씀하기 시작했고 진우는 집안 규칙을 공유하려 노력했다.

현수의 행동도 당장 고쳐지진 않았지만 몇 번의 일관된 반응이 쌓이자 아이는 서서히 새로운 기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작은 상처들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수연은 일하다가도 문득 불안에 젖어 숨을 고르곤 했다.

어느 저녁 현수가 잠들고 집이 고요해지자 수연은 노트에 적었다.


‘ 나는 현수를 사랑하고 좋은 엄마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의 가정을 소중히 지킬 거다.'


창밖으로 나지막한 불빛들이 깜박였다.

균열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또 다른 도전이 언제 올지 몰랐다. 그러나 그 밤 한 가지는 분명했다.


수연과 진우 현수는 진짜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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