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다가오는 균열의 소리...

각자의 삶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by 은나무


주말아침도 언제나 그렇듯 너무 이르게 와 있었다.

현수는 늘 그랬듯이 일찍 깨어 소파와 거실을 마구 뛰어다녔고 주방에서는 커피 내리는 소리와 달걀 굽는 소리가 어긋나며 섞였다.

수연은 천천히 손을 씻고 토스트를 굽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여보, 우리 엄마 왔나 봐.” 진우의 목소리가 잠깐 긴장했다.


현수의 할머니 그러니까 진우의 어머니는 늘 그렇듯 시간 약속 없이 찾아왔다.

처음엔 ‘도와주러 왔다’고 말했지만 문을 열자마자

그 ‘도움’은 명령과 지시로 바뀌었다.

“어머 설거지가 왜 이렇게 쌓여있니. 가스레인지도 같이 닦아라.” “그 반찬은 어떻게 만든 거야? 설탕을 너무 많이 넣으면 안 된다.”등등...


수연은 미소를 띠우려 애썼다.

속으로는 오래된 불편함이 치솟았다.

“네, 알겠어요.” 수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날의 균열이 제대로 드러난 건 점심쯤이었다.

현수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새 과자를 꺼내 먹다가 실수로 주스 컵을 탁자에 쏟았다.

주스는 바닥으로 번졌고 현수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수연이 휴지로 닦으며 “괜찮아, 이모가 치워줄게”라고 말하자, 현수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이모가 밀었어! 이모가 나를 밀어서 그런 거야!”


그 말에 시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말은 채 다 채워지지 않았지만 이미 판정은 내려진 듯했다.

“봤지? 네가 자꾸 아이를 혼내니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시어머니는 현수를 꼭 끌어안고 진우를 보며 덧붙였다. “내가 현수를 어떻게 키웠는지 알잖니 이런 일 때문에 현수가 걱정스러워 내가 가만히 집에 있을 수가 없구나."


진우가 마트에 갔다가 집으로 들어오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눈이 수연과 현수 사이를 오갔다.

“여보, 무슨 일이야?”

수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시어머니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현수가 넘어졌는데… 수연이가….”

시어머니의 말투는 이미 결론을 내고 있었다.


그 순간 수연의 속이 타들어갔다.

작은 누적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그동안 꾹꾹 눌러둔 말들이 입술을 밀어 올렸다.

“진우 씨 내이야기도 좀 들어봐요.”

수연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제가 일부러 아이를 혼내고 울리겠어요? 방금 장난치다가 주스를 쏟은 건데 제가 밀어서 그랬다고 울면서 핑계를 대고 어머니에게 가잖아요.”


진우의 눈이 흔들렸다.

그는 현수에게 친엄마의 빈자리와 수연과 현수의 관계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지키려는 부담 사이에서 늘 줄타기를 해왔다.

그래서 처음엔 시어머니의 편을 드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지만 지금 진우는 자신의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지 마. 엄마 자꾸 현수 오냐오냐 하지 말고 오늘은 그만하고 넘어가자.”라는 그의 평소처럼 어중간한 입장의 말투는 수연의 심장을 더 쿡 찔렀다.

“그냥 넘어가면 돼요?”

수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가시가 있었다.

“저는 여기 현수와 함께 사는 사람이에요. 현수의 엄마라고요. 그런데 모든 걸 제가 먼저 잘못한 것처럼 말하고 그걸 당신이 가운데서 역할을 잘해주지 못하면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죠?”


그 대목에서 진우의 태도가 흔들렸다.

그는 수연과 아들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두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는 역할 때문에 갈등했다.

그의 눈에 갈팡질팡함이 비쳤다.

여보… 엄마가 자기 의도를 몰라서 그랬던 걸 거야. 내가 잘 말할게.” 진우는 급히 말했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불편한 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구나 미안하다 내가 이해해야지.”


시어머니는 불편함을 감추며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현수가 새엄마가 생기고 내가 없이 새로운 환경에서 상처받을까 봐 걱정해서 그랬다. 네가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를 너무 다그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너의 자리’를 평가하는 잔혹함이 묻어 있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집 안 공기는 어색하게 식었다. 진우는 수연에게 부드럽게 말하려 했지만 집요하게 반복되는 시어머니의 간섭은 결코 한두 마디로 정리되지 않았다. 수연은 종종 자신이 감정적으로 과민해지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계속 참아야 할 것인가’ 하는 다른 질문이 자리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현수의 행동’이었다.

아이는 네 살답게 때때로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아빠의 주의를 끌기 위한 울음 할머니가 오면 갑자기 더 착한 척하는 태도 버릇처럼 물건을 던져 보며 반응을 살피는 작은 조작들.

아빠와 할머니의 눈에는 사소하지만 그 반복은 수연을 지치게 했다.


며칠 후 시어머니께서 시간이 늦어 주무시고 가시겠다고 했다. 수연은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곧 잘 놀던 현수가 일부러 장난감을 부수고는 큰 소리로 울었다. 시어머니는 “애가 왜 이모랑 같이 살고부터 자주 울고 그러냐”라며 수연의 잘못으로 단정 짓곤 했다.

그런 장면이 쌓일수록 수연은 자기가 자꾸만 ‘가해자’로 규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사소한 조작들은 어쩌면 아이의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낳아준 친엄마와 분리되어 생활해야 하는 과정에서 오는 불안함. 자신을 둘러싼 어른들의 갈등을 감지한 아이는 가장 쉬운 방식으로 주의를 끌었다.

문제는 그 행동을 ‘증거’로 읽는 어른들이었다.

시어머니는 그것을 그대로 확대했고 진우는 종종 ‘아빠’로서의 본능으로 아이를 먼저 달랬다.

그 간극 속에서 수연은 점차 고립되었다.


다음 날 수연은 미용실에 출근해 가위를 잡았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순간 일시적인 평온이 찾아왔다. 동료들은 수연의 눈빛을 보고 다정하게 물었다.

“수연 무슨 일 있어?”

수연은 긴 숨을 내쉬고는 웃었다.

“괜찮아요.” 그렇지만 수연에게 ‘괜찮다’는 말은 이미 많이 닳아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결말을 향한 작은 전환점이 왔다.

진우가 저녁식사 후 조용히 앉아 말했다.

“엄마한테 좀 선을 긋자. 우리가 이 집을 함께 만들어가고 자기가 이제 현수 엄마라는 걸 분명히 해야겠어.”

그의 말은 단호했지만 목소리엔 피곤함이 살짝 묻어 있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를 완전히 재설정하려는 시도는 그를 괴롭게 했다. 어머니를 ‘거절’하는 일은 그의 마음 한편을 찌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와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곧바로 방어적으로 굴었고

“너희가 나를 배제하려 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진우는 멈추지 않았다.

“엄마, 이제 우리 셋이 함께 살기로 했잖아요. 엄마가 걱정돼서 도와주시는 건 고맙고 감사한데 이제 우리 방식대로 아이를 일관되게 가르치고 훈육하며 키우고 싶어요. 저와 수연이가 현수의 부모입니다.”


그 말이 작게는 수연의 숨을 가볍게 만들었다.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다.

시어머니는 쉬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현수의 작은 연기는 앞으로도 종종 불편한 장면을 만들 것이고 진우는 두 집단 사이에서 다시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날 밤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아 나눈 말 한마디가 작은 약속이 되어 남았다.


수연은 거실에 놓인 화분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노트에 적었다.


‘가족이란 하나로 합쳐진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끌어안는 것이다. 나는 지혜롭게 대처하며 가족을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이 틀리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창밖으로는 가로등이 길게 비췄다.

밤은 아직 깊었지만 수연의 가슴속엔 어둠만 있지 않았다.


불안과 갈등이 함께 있어도 수연은 이제 혼자가 아니며 다시는 현실의 벽에서 도망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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