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부터였다.
그는 슬쩍슬쩍
내 삶의 문을 하나씩 잠그기 시작했다.
“연이야, 내 카드 쓰면 되잖아. 현금은 뭐 하러 챙겨?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해.”
처음엔 그게,
나를 아껴주고 책임져주는 거라 생각했다.
나는 지갑에 현금이 거의 없었고 핸드폰 요금도, 엄마한테 드리는 돈도 모두 그가 보내주는 돈으로 해결했다.
편했다.
정말 편해졌다.
근데… 어색했다.
갑자기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예전에 일할 때는 비록 몸은 힘들어도
스스로 벌어 내가 챙기는 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허락해야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동생 미진이가 나를 보러 온다고 했다.
“오늘은 언니 집으로 갈게! 언니 너무 보고 싶어!”
그런데
나는 순간 망설였다.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말없이 날 찌르던 그 서늘함…
그래서 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미진이에게 약속을 미뤘다.
미진이는 의아해했다.
“언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분위기가 이상한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하 웃어넘겼다.
“뭐가~ 아무 일 없어~~ 언니가 오늘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근데 거짓말을 하고 있는 내가
제일 이상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와
나를 꼭 안았다.
따뜻한 품인데,
내 심장은 묘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그 품 안에서
문득 깨달았다.
내가 점점 혼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그 무렵부터 그는 내 휴대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다.
“우리 연이 비밀번호 뭐야? 까먹어도 내가 열 수 있게 알려줘 봐~ 커플끼리는 이런 거 다 공유하는 거야.”
나는 별생각 없이
숫자 네 개를 알려줬다.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내 앞에서 숨길 거 없지?”
그 말이
왜 그렇게 이상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연스럽게
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누구랑 연락했나~?”
밝게 웃으며
카톡 목록을 위에서 아래까지 훑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이 스멀스멀 굳어졌다.
며칠 전 미진이에게 온 톡이 있었다.
[언니 괜찮아? 목소리가 이상했어.]
그는 그 메시지를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그러나 정확히 말했다.
“미진이는… 요즘 왜 자꾸 연락해?”
“그냥… 친하잖아”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살짝 웃었다.
근데 눈이 웃지 않았다.
“연이야 걔는 동생이지 친구도 아니고, 내가 말했지 까질대로 까져서 어울리지 말라고.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어 오빠말 들어."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을 말인데
그날은 유난히 목소리에 ‘명령'이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이 여전히 내 휴대폰을 쥐고 있는 게
괜히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일부러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 미진이한테 요즘 바쁘다고 얘기할게.”
그는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연이 착하다.”
그제야
휴대폰이 내 손에 돌아왔다.
손끝이 차가웠다.
심장도 같이 식어가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그는 내가 어디 있는지
항상 알고 싶어 했다.
“연이야, 지금 엄마한테 잘 갔어?”
“엄마랑 같이 사진 하나만 찍어서 보내봐.
어머니 잘 계시나 얼굴도 뵐 겸”
처음에는 당연하게 느껴졌다.
나를 사랑하니까 궁금할 수 있지.
보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사진을 보낼 때
괜히 긴장하는 나를 발견했다.
“어디야?”
“아까 말한 그 공원 맞지?”
주변 배경까지 자세히 살피며
확인하는 그의 눈빛이
점점 낯설어졌다.
어느 날은
집 앞 편의점에 잠깐 나왔을 뿐인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왜 안 받아? 지금 뭐 해?”
“그냥… 편의점. 물 좀 사려고 나왔어.”
"왜 말도 없이 나가!"
말해야 나갈 수 있는 생활.
그게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며칠 뒤 나는 그에게 허락을 받고
강남에 살고 있는 미용 배울 때 알게 된 언니를 만났다.
오랜만에 본 언니는 여전히 다정했고
나를 보자마자 꼭 안아주었다.
“연이야, 너 진짜 고생 많았다…
그래도 얼굴 좋아졌다. 그 사람이 잘해줘?.”
언니는 항상
내 편인 사람 같았다.
우린 간단히 밥을 먹고 소주 한 잔씩 했다.
오랜만이라 그간의 이야기도 하며 한잔이 두 잔이 되고
마시다 보니 어느새 술이 슬슬 올라왔다.
언니 집이 근처라 술도 깰 겸 언니네 집에 갔다.
딱 시원한 맥주 한잔씩 하면서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 수십 개.
메시지는 더 많았다.
-어디야!”
-왜 전화 안 받아?”
-지금 뭐 하는데?”
-남자랑 있어?”
-대답해 빨리”
-연이야 이연이”
-아니 씨발 뭐 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현 언니 집에서 잠들었어… 미안해…”
그는 내 말도 끝나기 전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지금 주소 찍어. 당장 데리러 가게.”
문을 열자 벌컥 당겨 제치고 그가 들어왔다.
언니가 놀라 일어나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는 언니에게 차갑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만날 거면 연이 다시는 부르지 마세요.”
나를 보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연이야. 네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생각은 해봤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까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언니가 중간에 나섰다.
“저기 선우 씨... 연이 진짜 그냥 저하고...”
“지현 씨라고 했죠! 듣고 싶지 않으니 조용히 하시죠.”
그의 그 한마디에
방 안이 얼어붙었다.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그의 화가 향하는 방향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는 걸.
차 안으로 끌려 나오듯 따라 나왔다.
입술이 바짝 말라붙고 손은 덜덜 떨렸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그가 내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이야. 나를 병신 만들지 마. 밤새 내가 얼마나
미친놈처럼 있었는 줄 알아?”
그 말이
나를 더 죄책감에 빠뜨렸다.
내가 잘못했나?
내가 조심했어야 했나?
그 순간은
그렇게 믿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은 조용했다.
창밖으로 스치는 불빛만이
긴장한 내 숨소리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