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지는 소리

by 은나무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해… 언니랑 술 마시고 그렇게 된 게 큰 잘못은 아니잖아…”


그는 대답 대신

앞만 보고 운전을 계속했다.


그 침묵이

말 보다 무서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내 손목을 잡아

거실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연이야. 나는 네가 누군가에게 다시 상처받을까 봐 그게 싫어. 네가 다치는 게 제일 무서워.”


그 말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근데… 왜 이렇게 나한테 무섭게 말해…”


내가 울먹이자 그는 재빨리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니야, 아니야.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그 손길은 따뜻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차가움이

아직 식지 않아 내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


“연이야.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너는 이제 내 사람이잖아. 내가 지켜야지. 그리고 맞아. 나 무서운 사람 맞아. 니 앞에 있는 나 이선우. 너랑 살고 있는 지금 이선우. 나 무서운 사람 맞아. 너에게만큼은 무서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연이야. 부탁이야. 내가 화나지 않게 도와줘. 너는 너무 작고 여려서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 말이

내 가슴을 죄고 들어왔다.


아니,

그래서 더 세게 그의 품에 안겼다.


나를 이렇게까지 원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었던가?

엄마 마저 같이 지내자는 나를 뿌리쳤다.


나는 결국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중얼거렸다.


“… 걱정시켜서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그는 그제야 안심이 된 차분한 목소리로


“그래. 연이야 내 곁에만 있어. 그거면 돼.”


순간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의 품 안에 있었지만 천천히 그의 힘 앞에서 무너지는 나를 발견했다.




[이선우]


1972년생.

가족: 친어머니, 이복남동생 1명

본가: 서울시 마포구


그의 말에 따르면 어릴 적 그의 아버지는 여느 사연 있는 집 흔한 레퍼토리처럼 술에 절어 노름과 여자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드는 게 일상 다반사였고 어머니는 늘 폭력과 폭언에 시달리며 본인은 어린 이복동생과 숨거나 도망가는 일이 먼저였다고 한다.


사실 그 이복동생도 아버지가 밖에서 바람피워 낳아온 자식인데 그의 어머니가 품어 주신 거라고 했다.

그 동생이나 본인이나 그 아버지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 비참하게 사는 게 마찬가지라 여긴 그는 이복동생마저 불쌍히 여겨 각별히 돌봤다고 했다.


나와 가끔 그의 본가에 가면 그의 어머니, 동생을 함께 만났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동생이 내게 깍듯이 형수님이라고 존칭해 주는 게 어색했다.


그는 그런 어린 시절을 거쳐 고등학생 무렵부터 주먹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는 뭐 그들의 잡다한 일을 하는 게 고작이지만 거기 있으면 뭔가 자신감이 생기고 힘없고 가난한 자신이 무시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그 세계에 발을 던지고 시간이 점차 흘러 나이가 먹을수록 자신의 위치도 점점 올라갔다고 한다.


내 나이대에 만날 법한 껄렁한 양아치 같은 수준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서열이 있고 그들의 사업을 운영하는 위치쯤 되어 보였다. 어느 날 그는 나를 데리고 어딘가 가고 있었는데 급한 전화를 받고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잠깐 들렀다.


검고 큰 차들.
여기저기 눈에 띄는 문신.
굵은 목소리.
폭력으로 성장한 힘.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형수님”이라 불렸다.

나는 그걸 농담으로 웃었지만
어쩌면 그날부터 도망칠 수 없는 길이
조용히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은 그의 친구모임 이라며 나를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냥 사적인 모임이라 편하게 동행해도 된다며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그들은 그에게 내 앞에서 대놓고 말했다.

" 제수씨 앞에서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너 진짜 못된 새끼다.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게 생긴 어린 아가씨를 네까짓 게 같이 산다고 하는 게 친구지만 참 쓰레기네 이 새끼. "

웃으며 말했지만 뭔가 의미 있게 들렸지만 그때 나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고 농담으로 흘렸다.


그는

"야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나 쓰레기인 줄 알 거 아냐 이 새꺄! 내가 얼마나 우리 연이를 아끼는데...

어리고 이쁘고 착하기까지 하니까 부러워서 그러냐?"


분위기는 보통 친구들 모임의 대화였는데

그 공간에서 분명 이들은 눈에 띄어 보이긴 했다.

목소리며 포스며....


점점 이선우 이 사람과 깊어질수록 왜 이 사람이 술을 과하게 마시지 않거나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닮아 술을 그 이상으로 먹으면 다른 사람이 되곤 했다.

처음이었다.

사람 안에 다른 영혼이 씐 모습처럼 보였다.

얼추 술에 취하는 끝이 있는데 그 이상을 먹으면 눈빛이 이상해지고 말투도 행동도 전부 이상해졌다.


마치 그 안에서 잠자고 있던 귀신이라도 나온 거 같은.

눈은 마주칠 수 없이 무서웠고 평소 말투보다 엄청난 두려움을 주는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그의 주체하지 못하는 몸은 작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날.

그는 가게에서 누군가 접대할 일이 있어 술을 마셨고,

그 이상 선을 넘을 듯 말 듯 취해서 왔다.


나와 이야기 좀 하자며 이미 취한 그는 술을 꺼내와 나를 앉혔다. 그리고 이어진 고통스러울 정도의 협박인 듯 아닌 듯 나를 짓누르는 이야기들.


그리곤 그 무서운 눈빛이 되어 침대에 쓰러졌다.

평소 어지간히 마시면 골아떨어지는 사람인데

이럴 땐 금방 잠도 안 잔다.


침대에 누워서 온갖 알 수 없는 말을 하다가 나한테 소리 지르다가 화를 냈다가 하는 모습이 무서워서

조용히 소리 없이 앉아있었다.

같이 사는 콩이도 무서웠는지 침대 구석 커튼사이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욕을 하며 발로 침대옆 베란다로 이어진 창문을 냅다 찍었다.


이중창이었던 창문이 와르르 깨져 내려오고 거기 숨어있던 작은 강아지 콩이가 낑낑대며 얼른 나에게 왔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콩이 하얀 털 위에 유리 잔해가 떨어져 있는 걸 보고 두려움에 눈물이 났다.


그는 그렇게 점점 잠잠해 지면서 잠이 들었고 나는 울면서 콩이 털 속에 박힌 유리조각들을 찾고 있었다.


그게 그의 두 번째 징조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그가 화를 내면, 세상이 깨진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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