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멸과 수치심, 그리고 고립

by 은나무


선우는 내게 사실대로 이야기한 것이 뭔가 대단히 나에게 모든 것을 준 것 마냥 더 당당해졌다.



보통은 이렇게 된 경우 상대방에게 실망시킨 거 같다거나 속였다는 미안함에 잠깐이라도 고개를 숙일 거 같은데,

선우 그 사람은 나에게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말하게 된 것도 자신이 내 앞에 진실하게 쏟아낸 것 마냥 당당했다.



그 뒤 그는 숨기지 않았다.
아무 때나 내가 옆에 있든 말든 상관없이 아이들과 통화를 했고, 그럴 때마다 나의 숨소리조차 조용히 시켰다.

그리곤 내가 언제 들었었나 기억이 안 날 정도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아이들과 통화를 이어갔다.



내 눈치가 보여서라도 금방 끊고 다시 통화해도 될 것을

나를 한참 동안이나 입막음시키고 당당하게 내 앞에서 유난을 떤다.



어느 날.
그는 아이들을 만나고 오겠다고 했다.
저녁까지 먹고 밤늦게 천천히 온다길래,
나도 그 핑계를 삼아 그나마 건전하니 만나도 된다는 강남 사는 지현 언니를 만나겠다고 했다.



내키지 않는 눈치지만 본인도 아이들을 보러 가야

하기 때문에 내게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나는 오랜만에 그 집, 그 동네를 벗어나

이선우 없이 자유롭게 해방된 기분이었다.



숨이 얼마나 가볍고 시원하게 쉬어지는지

날아갈 거 같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이는 거 같았다.

마냥 바람 빠진 널브러진 풍선에 갑자기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차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콩이야 언니 금방 올게 집에 잘 있어"



하루 종일 콩이랑만 붙어 지내다 보니 깊은 정이 들었다.

잠깐 자유의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기쁜 순간에도

혼자 남아있을 콩이가 눈에 밟혔다.




나는 강남역에서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내게 결혼할 사람이라며 남자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그 자리에 불렀다.



언니의 고생스러웠던 그동안의 사연도 다 알기에

나는 결혼한다는 언니의 소식이 무척 기뻤다.



언니가 다니던 회사의 직장 선배라고 소개했다.

지현 언니는 미용을 배워 자격증을 땄으나

미용일은 적성에 맞지 않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소기업회사에 경리로 들어가 일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곧 도착한 언니의 결혼 상대자.



와 오랜만에 보는 평범한 회사원 20대 후반의 젊은 직장인.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늘 어둡고 컴컴하고 칙칙한 남자들만 보다가 이 평범한 사람이 언니의 결혼 상대자라니, 나 보다 나은 삶을 살 거 같아 너무 기뻤고 그런 언니가 부럽기도 했다.



아무튼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언니가 결혼을 하기로 한

사람을 소개하는 이 자리가 나는 중요했고 기분 좋은 자리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온 자유와 평범한 시간들에 나도 모르게 취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아, 자유가 좋아, 언니의 앞날이 기대되어 기분까지 한껏 업된 나는 선우를 잊은 채 마시고 또 마시다 어느새 술에 취했다. 언니도 남자친구도 다 같이 적당히 알딸딸해 졌고, 우리는 그때 많이 있었던 술 파는 노래방 "준코"에 갔다. 여기는 각각 노래방안에 있는 방 안에서 노래도 부르고 호프집 메뉴처럼 다양한 안주와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다.



우리 셋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고 웃고 즐거웠다.

잠깐 잠잠해진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
시간은 밤 11시쯤.
그 사람 이선우였다.



나는 밖에 나가 전화를 받았다.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러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들었다.



"너 어디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노래방이야?

너 아직도 집에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야!!!

지현이 만나고 있는 거 맞아??? 둘이 뭐 한다고

이 시간까지 놀고 있어!!! 거기 어디야!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씹고 진짜 이럴래!!"



"놀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 핸드폰은 전화 오는지 몰랐고. 언니랑 강남에 있겠다고 말하고 나왔잖아.
왜 이렇게 화를 내. 지금 엄청 오랜만에 나도 내가 아는 사람 만나서 얘기도 하고 재밌는데. 그리고 언니 결혼한다고 남자친구도 소개해 줘서 같이 있어."



"뭐? 미친 거 아냐? 남자까지 여태 같이 놀고 있었다고?"



"언니 남자 친구야. 결혼할 사이고"



"그건 식장에 들어가 도장 찍어 봐야 아는 얘기고,

네가 왜 그 남자새끼 있는데 같이 있어??

지현이 그년도 미친 거 아니야?"



"말을 왜 그렇게 심하게 해. 언니가 뭐가 미쳐 그리고 다른 남자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셋이 있는데 이게 왜 화낼 일이야!! "



"지금 당장 네가 있는 위치 찍어 보내.

내가 찾아서 확다 뒤집어엎기 전에."



또 시작이다.

술도 안 마신 거 같은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앞뒤 보지도 않고 흥분해서 날뛴다.



여기서 만약 그냥 가면 나는 그 사람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으로 만들어진 더러운 년이 될 거기에 기다리기로 했다.
언니도 있고, 언니의 남자 친구도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머리에서 상상하는 그냥 더러운 년이 되고 말았어야 했다. 그날 이후 정말 긴 시간 동안 언니부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고 너무 미안했다.



그는 도착해서 전화를 했다.
나는 조용히 혼자 룸 밖으로 나갔다.
언니랑 남자친구에겐 미리 이야기를 했고

데리러 오면 먼저 가겠다고 이야기를 해뒀다.



그런데 도착한 이선우의 얼굴이 이상하다.

술도 안 마셨는데 그 귀신이 또 튀어나온 듯 소름이 돋는다.
그는 내 손목을 휘어잡고 지현이 어딨냐며 나를 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저항했지만 얇은 손목만 부러질 거 같았다.



"오빠 언닌 잘못 없잖아. 그리고 이제 나한테 남은 유일한 언니야. 지현 언니마저 인연이 끊어지면 진짜 나 혼자야.
제발 언니한테 함부로 굴지 말아 줘."



나는 거의 울먹이며 애원했다.
이 남자 얼굴이 꼭 언니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쏟아낼 거 같이 보였고 내 소중한 지인을 또 잃게 될까 봐 무서웠다.



그는 언니를 금방 찾아냈다.
다짜고짜 문을 열고 언니에게 욕부터 했다.
" 야이 쌍년아!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

이딴 식으로 애 술 취해서 전화도 못 받고

정신 나가도록 쳐 놀 거면 다음부터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연이 주변 년들과 다르게 평범하고 건전한 줄 알고 그나마 만나게 뒀더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남자까지 데리고!!"



"선우오빠 지금 너무 심하신 거 아니세요?"



" 잠시만요, 연이 씨 남자 친구 분이신가 보네요. 잠시 진정하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지현이 약혼자입니다. 무슨 일이신지 일단 진정하시고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언니의 남자친구가 중간에 나섰다.
그제야 좀 정신이 차려지는지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내가 연이랑 같이 사는 남자요. 가끔 지현 씨 만난다고 하면 믿을만하다 싶어 만나라고 몇 번 했더니 만날 때마다 시간 늦어 연락도 안되고 술 취해 있고 어느 날은 같이 쳐 자빠져 자고 있고 내가 그럴 거면 연이 불러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오늘도 만나서 이 시간까지 대체 뭐 하는 거요? 당신도 지금 너무 하신 거 아니요? 이 시간까지... 둘이 결혼을 하든 말든 연이는 먼저 보냈어야죠.."



참 말하는 게 후졌다.

나는 처음 이 남자 어디가 어른스럽게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 났다.



"아 그러시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우리 지현이랑 각별히 친하다고 해서 오늘 같이 만났는데 제가 미쳐 생각을 못했습니다.. 제가 사과드리죠. 진정하시고 화 풀고 천천히 돌아가시죠."



바로 지현언니가 말을 이었다.



" 아니 선우오빠 솔직히 옆에서 보면 연이 너무 불쌍해요. 맨날 집에만 갇혀 사는 거 같고 애도 아닌데 가끔 나와서 이렇게 놀고 하는 거지. 이제 한창나이에 20대 중반이 다 돼서 맨날 갇혀 사는 게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요."



"아니 결혼할 사이라고 해서, 내가 지금 앞에 있는 이 남자 봐서 참고 그냥 가려니까, 참 말 × 같이 하네... 지현 씨가 연이 데리고 살 거요? 뭐를 건방지게 우리 일에 참견이야?

연이 친구라고 하하 호호 좀 해줬더니 니년이 그렇게 막말해도 될 만큼 우스워 보여?!!"



"지현아 가만있어! 네가 왜 나서고 그래.

아 형님 진정 하세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제가 잘 이야기할게요.
어서 연이 씨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먼저 데리고 가세요.... 제가 죄송합니다."



언니의 남자 친구는 이사태를 커지지 않게 하려고 애썼고 나는 그저 언니와 언니의 남자친구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갖은 수치와 모멸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이제 다시는 언니를 못 볼 거 같았다.



이날 이후,

난 이선우에게서 벗어나기 전까지.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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