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by 은나무


급하게 벌컥벌컥 마신 술은 그를 금방 취하게 만들었다.

숨 막히는 공포와 두려움.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서늘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이 초단위로 나를 흔들며

내 온몸의 모든 세포들을 깨우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취조가 시작됐다.



저 목소리는 누구이며,
저 게임은 어떤 게임이고,
게임 속 사람들과 매일 저렇게 놀았는지,
본인을 1년 넘게 속이며 기분이 어땠는지,
남자 없이는 못 사는 년인지,
자기 하나로 만족 못하는 년인지,
밤에 몰래 만난 적 있는지,
도대체 자기를 어디까지 기만할 건지,



진짜 온갖 말도 안 되는 자신만의 상상의 말들로
사람을 괴롭게 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나는 하나하나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이선우가 납득이 갈만한 이유를 말해야 했다.



그런 나 스스로가 이제는 진짜 사람 같지도 않았다.

억울함에 꺼이꺼이 울면서 겨우 대답하고 있었다.



울음을 억지로 참으려고 하면서 말을 하다 보니

자꾸 숨이 넘어가고 꺽꺽 소리가 나면서 말이 나왔다.



그 소리조차 불쾌했던 이선우는


"네가 뭘 잘했다고 지금 울면서 대답을

그따위로 하고 있어!"



그러면서 들고 있던 유리컵을 나를 향해 던졌다.

컵은 내 옆을 비켜나가 어딘가 부딪히며 깨졌다.



처음이다.
나를 향한 직접적인 폭력행위.



여전히 공포 속에 있었지만, 내 안에 이 모든 순간이

분노가 되어 치밀어 올랐고, 내가 도대체 뭐를 잘못해서

이 개 같은 새끼 비위를 맞춰가며 내 나이 27살이 다되도록 20대의 절반을 이 쓰레기 같은 새끼에게 모두 바쳤는가.

참을 수 없는 화가 터져 올라왔다.



사랑은 식은 지 이미 오래고 그저 연민 같은 무언가 남아,

서로 불쌍한 인생끼리 아니, 나보다 더 불쌍한 저 인간을 내가 버리면 그나마 사람처럼 살던 것도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될까 봐 안쓰러워서 곁을 지켰는데, 하루하루 일 년 이년이 갈수록 이 개자식은 나를 더 숨 막히게 했고 사람처럼 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아니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서둘러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엄마 나 지금 이선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아.

아저씨 같이 있으면 빨리 나한테 와줘.

제발 부탁해. 엄마 안 오면 나 오늘 죽어."



"무슨 일이야? 왜 그래! 괜찮아?"



"그런 말 할 시간 없어 지금 당장 와! 주소 문자로 보낼게.

엄마 지금 당장 안 오면 나 진짜 죽어. 아저씨랑 꼭 같이와"



"어 빨리 갈게"



그 순간 엄마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엄마가 매정하다 해도 하나뿐인 딸하나가 당장에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이선우라는 인간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분명 엄마는 나에게 올 거라 믿었다.



이선우는 화장실 앞에서 나를 나오라고 했다.

온갖 욕을 퍼부우며 당장에 나오라고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버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에 문을 부순다는 말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저 저 인간이 지풀에 꺾이기를
그사이 엄마가 제발 빨리 오기를.....



숨이 막혔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나 지금 엄마 불렀어. 멈추지 않으면 경찰까지 부를 거야."



내 친아빠가 있었다면 저 개 같은 새끼가 나를 이렇게 까지 짓밟고 무시했을까. 순간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났다.

우는 소리도 들키고 싶지 않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만 흘리며 화장실 문에 등을 기대고 울고 있었다.



그는 내가 엄마를 불렀다는 말에 갑자기 잠잠해졌다.
그리고 곧 술에 더 취했는지 막말을 하며 온갖 욕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처럼 살지도 못하는 년 데려다가 편하게 살게 해 줬더니 오히려 자기를 쓰레기로 만들었다. 너 같은 나쁜 년은 별수 없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 네 엄마가 온다고 내가 뭐 아이고 어머니 잘못했습니다.라고 할 줄 아냐 그냥 모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바닥에서 구제해서 잘 살게 해 줬는데,
마치 그 고마움도 모르고 날마다 자기를 속이고 남자나 밝히면서 하다 하다 이젠 온라인으로 그딴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쓰레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두 손으로 꼭 막은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1초가 한 시간 같던 그 긴 시간이 드디어 지나갔다.

40분쯤 지났을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에게 내가 못 내려가니 집으로 와달라고 했다.

혹시 모르니 아저씨도 같이 오라고 했는데 엄마는

아저씨는 차에 있으라고 하고 혼자 왔다.



문을 다급히 두드리며,

"연이야 연이야"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레 화장실에서 나와 현관으로 몸을 향했는데,


맙소사...



상체를 훌러덩 벗어젖힌 그 새끼가 문을 열며

"장모님 오셨습니까!" 하면서 술에 취해 인사를 했다.

아니 그건 인사가 아니라 엄마까지 겁박하는 태도였다.



엄마는 분명 놀랐을 텐데,



"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지금 옷까지 벗어젖히고

그 몸으로 나를 겁주려는 건가??? 이리 나와보게 연이야, 어딨어 엄마 왔어 얼른 나와"



그러면서 선우를 피해 집안으로 발을 디딘 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게 대체 뭔가!!! 자네 지금 내 딸을 진짜 죽일 작정이었던 거야?? 맨날 이렇게 데리고 살았어??

나 만나면 그렇게 자상하고 잘하는 척해서, 내가 솔직히 못 미더운 건 좀 있었어도 설마 했는데, 어리고 조금 한 애를 데려다가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데리고 산건가!!! "



"이 연이!!! 빨리 짐 싸! 니 옷가지랑 소지품 몇 가지만 챙겨 당장 나와! "



"어머니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시죠. 이거다 연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저년은 남자 없이는 못 사는 년이에요. 그래서 제가 버릇 좀 고쳐주는 중입니다."



미친 새끼.
아무리 화가 나고 술을 처먹었어도,
할 말 안 할 말이 있지. 집안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내 엄마 앞에서 상의를 벗어젖히고, 마치 온몸의 문신으로 엄마에게 겁을 주면서, 나를 저년이라 그러고 마치 진짜 바람피운 거처럼 이 난장판 속에서도 당당한 저 모습 사람새끼가 아니다.



나는 이 순간이 아니면 살아나기 힘들 거 같아 정신없이 옷을 대충 챙겨서 나왔다. 나를 따라 나오는 콩이를 보며 다시 눈물이 쏟아지는데, 나부터 살아야 했다.



콩이 때문에 떨어지지 않는 발이 겨우 떨어졌고,



"연이야, 어머니 오셨으니 가서 좀 쉬고 와. 며칠 지나서 다시 데리러 갈 테니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장모님 조심히 세요! 맘 같아선 연이 못 데리고 가게 하고 싶은데 제가 최대한 예의를 지키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죠.!"



현관문 열고 복도가 울릴 만큼 큰소리로 말했고, 낑낑 거리며 짖어대는 콩이의 목소리만 귓가에 맴돌아 발길이 무거웠다.



내게 달려와준 엄마가 너무 고마웠고, 미워만 하던 엄마옆에 아저씨가 그날은 새삼 고마웠다.



엄마는 괜찮니, 다친데 없니, 대체 무슨 일이니, 쉴 새 없이 질문을 했고 나는 대충 설명을 했다.
이런 일이 많았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처음이라 했다. 엄마에게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걱정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매번 엄마에겐 잘 지낸다고 했고,

가끔 엄마를 만나러 가도 이선우가 멀쩡하고 기분 좋을 때만 데리고 가서 만났다. 늘 엄마에게 나 잘 지내,

이 사람이 잘해줘 라며.....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나 살려줘 라며 전화를 하고,

놀라서 달려온 엄마 눈에 딸이 지내는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평범하게 사업한다던 딸의 남자친구 몸을 본 엄마는

그날 하루 모든 걸 눈치챈 모양이다.



"너 절대로 저 인간 다시 만나지 마라. 오늘 보니까 안 되겠다. 너 힘들어 못 산다. 엄마가 너를 도와주지도 못하지만 이건 아닌 거 같다."


"......"


엄마네 집에서 3일이 지났다.
엄마랑 아저씨가 일을 가고 혼자 집에 있다가 동네 피시방을 갔다. 그땐 피시방이든 술집이든 전부 흡연 가능이라서 담배도 편하게 피우면서 게임에 다시 접속했다.



며칠 전 갑자기 사라진 나를 다들 궁금해했고,

나는 갑자기 일이 생겨 그랬다고 핑계를 댔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즈음 집으로 돌아갈 때

그에게 전화가 왔다. 처음엔 받지 않았다.
그런데 끈질기게 전화를 했다.

전부 무시했다. 그랬더니 문자가 쏟아졌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앞서서 오해했다.]

[그날은 순간 일어나는 분노를 못 참았다.]

[애들한테 물어보니 그렇게 게임도 하고 그런다더라.]

[직접 만나지 않는다면 굳이 문제는 없다고 하더라.]

[내가 너무 너를 의심했다.]

[정말 미안하다.]

[마음 좀 풀리면 다시 돌아와라.]

[집은 다 정리해 놨다.]

[네가 없으면 나 죽을 거 같다.]
[콩이가 밥도 안 먹고 힘없이 하루 종일 움직이지 않는다.]

[제발 전화 좀 받아줘라.....]



위에 보낸 모든 말이 쓰레기 같이 들렸는데,
마지막 콩이 이야기에 또 눈물이 났다.
마음이 흔들렸다.

콩이는 무슨 죄인가 싶었다.

내가 힘들던 모든 순간 나와 함께 해준 콩이.....

콩이를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엄마는 극구 말렸지만, 나는 결국 겨우 나온 이 기회를 내 발로 다시 돌아갔다.
그 무엇보다 콩이를 버릴 수 없었다.
콩이만 따로 내게 보낼 인간도 아니었다.

엄마는 내 고집을 꺽지 못했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꼭 전화하라고 당부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이선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전의 사건은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 것. 한 번만 더 나에게 폭행을 가할 시 나를 놓아줄 것.]

이 두 가지를 지켜 달라고 했고 그는 알았다고 했다.
바보 같은 문자 따위... 그래도 그거라도 해놔야 들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거라 믿었다.



다시 들어간 그의 집...
기뻐 달려오며 온몸으로 안기는 콩이....
무거웠던 마음은 그새 풀어졌다.
콩이를 두고 나간 내가 너무 미안했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 연이야 우리 화해하는 기념으로, 바람도 쐴 겸 춘천에 김선배네 가서 한이틀 쉬다 오자. 뭐 내키면 며칠 더 쉬던가 형수도 너 잘 지내냐고 보고 싶다고 하더라. 거기 가면 편하잖아, 거기 갖다 오자."



춘천 김선배.



그가 예전에 잘 따르던 선배라는 사람.
지금은 조직에서 떠나 춘천 어느 계곡 근처에 집을 짓고 식당을 하며 조용히 살고 있는 이선우의 선배였다.
이선우가 나보다 10살 많은데 선배도 이선우 보다 8살이나 많았다.



내겐 거의 삼촌과 이모뻘.
그들의 눈에 마치 나는 딸같이 느껴진다며 귀여워해 주고 이뻐해 줬다. 사실 거길 가면 마음도 힐링이 되고 편하긴 했다.


선배는 유쾌했고 형수는 요리를 잘해서 늘 함께 있는 동안 맛있게 잘 먹고 잘 쉬고 왔다.



나도 이선우랑 집에 갇혀 있느니 콩이를 안고 따라나섰다.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한 차 안.
며칠 동안 집을 어떻게 치웠는지, 청소업체에서 얼마를 주고 치웠는지, 다시 가전제품을 사는데 얼마를 썼는지 어떤 걸 샀는지 등등...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놨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나서는 길이 그저 내 마음의 위로가 됐다.



우리는 두어 시간을 달려 선배네 집에 도착했다.
황토와 통나무로 만들어진 집.
굉장히 멋스럽고 이뻤다.

약간 산 쪽에 위치해 있어 집 앞마당이 커다랗게 집 앞 옆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마당 정면 쪽으로 산아래 살짝 비탈지어 있었다.



넓은 마당엔 강아지 두 마리가 풀어져 뛰어놀고 있었고,

작은 텃밭, 그 옆 수돗가 모든 게 그냥 힐링이었다.



이 집의 매력은 거실 통창이었다.
거실통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은 마치 그림 그 자체였다.

멀리 산이 보이고 앞으로 점점 나무들과 봄여름엔 꽃나무가 보였다.


나는 거실에 앉아있었다.

나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수를 나는 이모라고 불렀다.
나이차이가 많아도 술담배는 그냥 편하게 했다.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러 나갔고,

집안 거실 양쪽 끝에 맞바람이 통하도록 만들어 둔 문을 활짝 열어두고,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며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간이 정말 힐링의 시간이었다.


가끔씩 만나면 그 이모는 내게 늘 걱정 스레 말했다.

나이도 어린데 왜 이선우 옆에 있냐며, 도망가라고....
그때의 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그날도 역시 둘이 앉아 창밖을 보며 이모가 말을 꺼냈다.



"요새 어떻게 지내니. 선우 저 자식이 너 힘들게 안 하니? 연이야 진짜 딸 같아서 말하는 거야. 나는 네가 안쓰러워 죽겠어. 선우는 내겐 남편 후배지만 솔직히 저 인간들 진짜 무서운 새끼들이야. 네가 어려서 몰라서 그래.
나야 이 나이에 이제 저 인간한테 하도 맞아가며 길들여져 있어서 저 인간 손에 벗어날 길이 없어. 그래서 이러고 병신같이 산다지만 너는 아니야, 왜 너같이 어리고 착한 애가 저런 새끼옆에서 고생을 하면서 살아.

당장은 도망은 가기 힘들어. 지금부터 준비해 하나씩. 1년이든 2년이든 계획을 세워서 하나씩 준비해야 해.
도움이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고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은 다 알려줄게...

진짜 아니야, 더 늦기 전에 니 삶을 찾아가."


만나면 가끔 해주던 그냥 흘려듣던 이야기가

그날은 내 귀에 정확히 꽂혔다.


나는 별일 없는 듯 그리 말해줘서 고맙다 대답했다.

춘천에서 머무는 3일 동안 즐겁게 마시고 먹고,

편히 쉬면서 마음속으로 이모가 말해준 이야기를 되새기고 되새기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날 저녁.

마당에 조명을 밝혀두고 둘러 앉아 석쇠에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시며 각자의 속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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