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콩이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동안 쌓여왔던 모든 아픔이 쏟아져 나왔다.
선우를 만나기 이전의 기억들 까지...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자꾸 곱씹어졌다.
그만 생각해야지 마음먹어도 자꾸만 그 이전의
기억들까지 나를 괴롭게 했다.
참고 견뎌야 했던 연이의 모든 삶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멀쩡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얼굴 한번 사진으로 조차 본 적 없는 나를 낳아준 아빠.
그가 지금 내 곁에 있다면.
부모에게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보통의 아이들처럼
자라 왔다면, 나는 지금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까...
내가 이제 겨우 스물다섯인데 세상 밑바닥까지
내려와 천대와 멸시받는 일을 하고,
누군가 조금만 곁을 내어주면 방어조차 할 줄 몰라
그저 기대고 보는 바보 같은 나.
그런 내가 이 남자를 만나, 사랑이란 말에 속아 여기까지 왔는데 펴보지도 못한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날 것만 같았다.
그 두려움이 밀려오니 눈물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몇 시간을 콩이와 단둘이 불 꺼진 방 안에서 울었다.
눈과 머리가 아프고 기운마저 다 빠졌다.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누웠다.
천정을 멍하니 바라보다 지친 나는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이 부셔서 잠에서 깼다.
창문틈으로 들어와 반짝이던 기분 좋았던 햇살은
지금은 그저 짜증 나는 빛일 뿐이었다.
환한 게 싫었다.
커튼을 쳤다.
다시 집안을 어둡게 만들었다.
곧 마음이 편해졌다.
새벽까지 울던 내 얼굴은 눈이 잘 떠지지 않았고
찬 바닥에 누워 잤더니 몸도 아픈 거 같았다.
새벽에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는 듯한
콩이는 꼬리를 흔들며 여전히 내 곁에 있어줬다.
콩이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힘도 없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어디서 술을 한잔 마신 모양이다.
정신이 나간 상태는 아니고 그냥 적당히 먹은 듯 약간의 취기만 보였다.
그는 무심히 나갔다가 술을 마셔서 그런지
다시 뻔뻔하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 잠 좀 잤어? 나는 머리도 식힐 겸 나갔다가
혼자 한잔하고 왔어."
나는 뒤돌아 누워 대답하지 않았다.
"나 좀 봐봐. 연이야, 나는 네가 그렇게 서럽게 울지 몰랐어.
미안해. 그런데 인생에 영원한 친구는 없는 거야.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몰라. 내가 다 너 걱정해서 그런다고 생각 안 해봤어? 솔직히 지현이도 너 우습게 볼걸?
저야 멀쩡히 잘 살다가 곧 결혼도 하고 그래봐.
애 낳고 사느라 너 만나주지도 않아. 어차피 떠날 인연이야. 내가 볼 때 썩 좋은 성격도 아니고."
"그만 화 풀어. 친구는 살다 보면 또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 그리고 니 옆에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어제 내가 너무 이성을 잃고 화낸 건 미안해.. 너 힘들게 하려고 한건 아닌데.... 네가 이러면 나는 또 신경 쓰여서 일도 못해.
오늘도 저녁에 중요한 자리가 있어. 자 이리 와봐 내가 안아줄게."
"내 몸에 손대지 마! "
선우 그 남자는 늘 이런 식이었다.
일방적으로 화내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뒷일은 생각 안 했다. 당장에 자기 기분대로 저지르고 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 누가 상처를 받게 될지, 그런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혐오스러웠던 건 그리고 난 후 자기 합리화, 자기변호, 상대를 세뇌시키는 늘 반복적인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내 기분은 상관없이 자기 기분이 풀려서 괜찮아지면
나도 당연히 그래야 했다. 안아주고 토닥이면 안겨야 하고 화해하자고 침대로 데리고 가면 그저 인형처럼 있어야
하는 게 그와 나의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지난 새벽에도 그는 내가 화가 나 쏟아내는 감정은 회피하고 나갔다. 그리고 본인만 혼자 정리하고 와서 일방적으로 자신의 변명과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안아준다는 사람. 소름이 돋았다.
이럴 때 강하게 거부하면 또 집안이 난장판이 된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본 일이다.
당장에 벗어나지 못할 거면 그냥 받아주고 맞춰주고
이 시간을 버텨야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억울한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고 그때마다 나는 이선우에게 무언가를 얻어냈다.
그거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보상받고 해소가 되는 거 같았다.
이제 진짜 누구 만날 일도 없고 집에만 있어야 하니, 나는 컴퓨터를 요구했다. 집에서 게임이라도 하고 있겠다고 말했다. 안 그럼 매일 피시방을 가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달래려 할 땐 내 요구는 잘 들어줬기에 곧장 최신사양 게임용 컴퓨터를 집에 들였다.
그래 집에서 뭐 하냐 게임이라도 하고 시간이나 때우자.
그때 당시 한창 RPG 게임이 유행이라
나도 이것저것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선우는 내가 집에만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한동안 내게 나긋나긋했다.
나는 그러다가 어떤 무협 RPG 게임, 아이디를 만들었다.
접속을 했고 미션을 하나둘 수행하고 있었다. 재미가 생기고 그 안에서 게임 친구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접속을 하다 보니,
만나는 친구들이 같았고 그들과 게임도 하고 채팅도 하다 보니 숨구멍이 하나 생긴 거 같았다.
새로운 세상이었다.
가상의 나를 만들어 온라인에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같이 레벨업 하는 재미에 점점 빠질 때쯤, 이선우도 내가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살림을 하고 자신의 출퇴근을 맞이하는 게 편안해 보였다.
나는 꼭 그가 출근하면 컴퓨터를 켰고 그가 올 시간이면 게임을 종료했다. 항상 정해진 루틴대로 했다.
어느덧 몇 개월이 지나고 1년이 넘었다. 나는 이선우 없는 시간엔 화장실도 미루며 컴퓨터 앞을 지켰다.
나는 가상공간에서 게임도 잘하고 재치 있고 인기 많은 20대 여성 캐릭터였다. 내 게임 속 직업은 그 당시 힐러였는데 센스 있게 팀 안에서 역할을 잘했다. 그런 나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귀여워하며 좋아해 줬고 나를 늘 찾았다.
나는 현실에선 이선우의 여자로 충실했고, 그가 없는 시간이면 가상의 게임세계에서 내가 아닌 다른 캐릭터로 살았다. 길드도 생기고 레벨도 높아지다 보니 친하게 지내는 언니 오빠들도 생기고 좋았다.
같이 파티를 맺고 게임을 하는데 채팅이 버거울 때가 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그때에도 헤드셋을 연결해 음성으로 대화를 하며 게임을 하기도 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어려웠고 같이 해야 하는 숙제들이 많은 데다가 채팅으로 이야기하다가 타이밍을 놓치게 되니 우리는 자연스레 음성으로 대화를 하며 게임을 했다.
당연히 게임엔 관심 없던 그는 헤드셋이 그런 용도 인지 몰랐다. 어느 날 신나게 길드 언니 오빠들과 이야기하며 놀고 있었다. 그날은 미리 말도 없이 퇴근 시간 한참 전에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갑자기 당황해 스피커를 끈다는 게, 헤드셋 연결만 뺐고 그가 들어오는 순간 컴퓨터 스피커로 남자들 목소리가 막 쏟아져 나왔다. 당황한 나는 허둥지둥 컴퓨터를 끄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내 앞에 당도했고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서늘함과 동시에 그의 팔은 아직 꺼지지 않은 컴퓨터 모니터를 집어 들어 바닥에 세차게 던졌다.
그는 내가 늘 집에 있어도 확인했다.
하루종이 뭐 했는지 누구와 연락했는지.
통화는 누구와 했는지. 핸드폰 검사는 물론 내 하루 일과를 체크하던 사람이었다. 실수로 핸드폰에 흔적을 삭제하더라도 뭐가 남겨져 있거나 삭제 시도가 걸리면 그날은 하루 종일 추궁의 날이었다.
그렇게 집착과 감시가 심한 사람인데, 내가 집에서 있겠다고 해서 기분 좋게 사준 컴퓨터로, 남자들하고 희희낙락 놀고 있다고 생각한 이선우는 한동안 잠잠했던, 눈빛이 돌아간 분노와 이성 잃은 폭력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내던져진 모니터가 살짝 깨졌지만 분에 안 찬 그는,
다시 들어 바닥에 내리찍었고 본체도 꺼내서 발로 밟고 망치로 부수고 난리가 아니었다.
나는 진짜 바람이라도 핀 장면을 들킨 죄인이 처럼,
이선우의 횡포를 두려움에 보고 있어야 했고 옆에 있던 콩이도 떨고 있었다.
그는 티브이를 던지고 온갖 부숴버릴 것들을 찾아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린 그는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에 갔는데, 잠시뒤 와장창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 급히 가보니, 화장실 선반이며 거울을 주먹으로 깨부수고 있었다.
그의 손에선 유리가 박히고 피가 나오 있었다.
나는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겨우겨우 긴 숨을 참아가며 앞으로 이 난리가 언제쯤 끝날까 공포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 내가 진짜, 지금 너를 싸대기라도 한 대 치고 싶은데 한대라도 니 몸에 손대면 멈출 수 없을 거 같고, 그러면
너 이 자리에서 죽을까 봐 참고 참고 또 참는 거야."
그리고 그는 다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서있었다.
그는 갑자기 주방으로 가 위스키를 가져왔다.
물컵에 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두려움은 더 커져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저 뜨거운 술이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내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어떻게 이 상황이 끝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선채로 벌을 받듯
그가 잠잠해 지길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