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각자 저마다 서로에 대한 생각을 가면뒤에 감추고 여전히 가면 앞에 친밀함을 씌워 그날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의 옛날 화려했던 과거 이야기!
싸움, 의리, 젊음의 혈기, 추억들.....
나는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들어가며 추임새를 넣었지만 속으로는 별 갖지도 않은 허세를 연약한 우리 앞에서 떠드는구나 생각하며 그저 혐오스러웠다.
내가 볼 때마다 김선배는 이모에게 자상하게 대해줬고
엄청 잘 챙겨줬다.
김선배는 작고 말랐지만 단단해 보였고,
얼굴인상은 약간 남성미가 짖었지만 잘생긴 편에다가 호감형 얼굴이었다. 농담과 장난을 잘 치며 웃는 얼굴과 소탈한 말투로 다정하게 대해줬다. 가끔 풍기는 강단 있는 모습에 보통은 아니었겠다 생각은 들었다.
그러니 여자를 때렸다는 이야기.
이모를 그렇게 길들여 지금 까지 자기에게 굴복시키고
살고 있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이모가 나에게 말한 '무서운 새끼들'의 의미는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
이들의 과거 전력? 폭력성? 어떤 걸 말하는 걸까....
뭔가 다른 게 있는 거 같았지만 더 물어보기도 뭐 하고
눈치로 알 수도 없었다.
그저 나보다 이들과 더 오랫동안 알아온 세월이
내게 많은 걸 경고해 주는 거겠지....
내가 아는 현재의 이선우 만으로도 두렵고 버거운데
'무서운 놈'이면 대체 뭐가 더 숨겨져 있는 건지 웃고 있는
내 얼굴 뒤에 뒤통수는 두려움 때문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들은 앞으로 삶의 계획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선배가 이선우에게
"너 정리는 다 했냐? 이제 연이 씨랑 몇 년 됐지? 같이 살 거면 얼른 깨끗이 정리해 인마!"
"예 아직 못하고 있어요... 애들 때문에... 이제 곧 정리해야죠. 저도 이제 연이랑 혼인신고 하고 제대로 살아야죠.."
"너 그럼 안 되는 거야. 두 사람 모두 에게 못된 짓 하는 거야 인마. 어서 빨리 정리하고 연이 씨랑 진짜 같이 살 마음 있으면 정식으로 같이 살아. 뭐 하는 거냐! 앞날이 창창한 딸 같은 아가씨를 데려와서. 내 딸이었으면 너 이 새끼 나한테 죽었어 인마! 너도 니딸이라고 생각해 봐. 너 같은 놈한테 줄 수 있어?"
"예 그래야죠. 연이가 착해서 그런 거 저도 잘 알아요... 잘해 줘야죠. 앞으로 저도 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듣고 있던 형수가 말했다.
"선우 씨 연이 애기 같잖아.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고
지금 여기 우리랑 같이 있는데 나는 볼 때마다 안쓰러워. 솔직히 삼촌이 나쁜 거야! 잘해줘!! 나는 작고 어린 게 가여워 죽겠어!"
"아! 형수님 마저 왜 그러세요!! 제가 정말 나쁜 놈 같잖아요... 저도 나름 잘 챙기고 아껴주고 있어요...
형님, 형수님 말씀 잘 새겨듣고 잘 살아 보겠습니다."
"연이야!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사랑해 연이야 앞으로 더 잘살아 보자!"
순간 모두가 나를 보며 소리 내 웃고 있었다.
나는 듣고 있던 이야기 중에 '정리는 했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때부터 그 생각에 깊이 빠져있느라
이선우가 짓거리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왜들 웃는지도....
아무튼 그날은 다들 훈훈한? 훈훈한 척?
뭐 그런 마무리를 했고, 나는 한 가지 의문점을 품고 다음날 이선우와 서울로 올라왔다.
한동안 아무 일 없이 우리 사이엔 편안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니 내 속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단지 그때 말한 '정리했어?'라는 그 말의 뜻을 물어봐야
할 거 같았고 그걸 알아야 내 시끄러운 속이 좀 잠잠해질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느 평범한 오후.
여느 때처럼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뒤 우리는 잠에서 깼다.
이선우와 나는 물 한잔씩 마시고 정신을 차린다음 나는 잠에서 깨려고 세수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전날 잠들기 전 내내 생각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아침에 일어나면 그 이야기를 꼭 하고 넘어가야지 곱씹으며 잠들었고 잠에서 깬 시간은 오후였지만 우리에겐 그 시간이 아침이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 씻고 나와 소파에 앉았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콩이랑 장난치고 있는 이선우에게 이야기 좀 하자고 말했다.
말을 꺼내자니 긴장감이 돌았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몇 번의 담배연기를 내뱉고 난 후 나는 조심스레 그날의 일을 물었다.
"춘천에서 말이야 김선배가 정리 잘했냐고 말한 게 뭐를 말하는 거야? 그땐 그냥 별 뜻 없이 듣고 흘렸는데 서울 와서 생각해 보니 무슨 말인가 싶어서 궁금했어. 뭐야 그게?"
" 아 별거 아니야. 그냥 뭐 너 만나기 전에 이거 저거 벌여 논 거나 뭐 그런 거 말한 거지..."
이선우는 당황한 듯 괜히 콩이를 부르며 대충 말을 얼버 무렸고 나는 직감했다.
뭔가 있구나.
집요한 구석이 있는 나는 오늘 무슨 난리가 나더라도 꼭 알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나 좀 봐, 지금 왜 나를 피하고 대충 얼버무려?
오빠 나한테는 속이지 말라며 1분 1초까지 다 파내는 사람이잖아. 내 핸드폰 검열부터 오빠가 나에 대해 모르는 거 하나도 없는데 오빠는 나에게 말하지 않는 게 너무 많아!
오빠가 이런 식이면 나도 오빠랑 계속 이대로가 맞는지 생각해 봐야겠어. 그동안 나 너무 힘들었는데 그래 차라리 오빠가 이렇게 나 속이고 나만 다 갈기갈기 벗겨서 못살게 굴고 놓아주지도 않으면 그냥 죽어 없어져 버릴래.
하루에도 몇 번씩 죽으면 어떨까 생각해.
어떻게 죽어야 안 아플까.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조용히 사라질까.
맨날 그 생각만 하고 살아.
나하나 없어져 봐야 슬퍼할 친구 하나 없어 이제.
이선우 너 하나 보고 사는데 너마저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니멋데로 대하면 나는 네가 곁에 있어도 세상에 혼자야.
말해 주기 싫으면 니 멋대로 해.
너도 내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 말아.!"
나는 쏘아붙였고 이선우는 내 말을 듣고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콩이와 장난치고 있었다.
개자식!
대답 없는 이선우에게 나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냥 건조하게 지냈다.
네가 나를 그것밖에 생각 안 하고 그렇다고 나 역시 너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게 그냥 내 팔자인가 보다.
이렇게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라는 모습으로 1주, 2주, 3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이선우에게 말없는 시위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지금 써 내려간 말 그대로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거 그거 하나였다.
이선우가 출근하면 나는 매일 콩이와 둘이 앉아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 취하면 어떻게 죽을까 고민만 수백 번....
그러다 마지막에 꼭 떠오르는 한 사람.
엄마.
세상에 피붙이라곤 오직 나하나 밖에 없는 그녀에게,
세상 더러운 팔자 온몸으로 다 맞고 사는 그녀에게,
나마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기 싫었다.
그리고 혼자 남을 그녀가 불쌍했다.
나한테 서러움만 준 엄마인데 그 엄마가 눈에 밟혀 끝내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곤 눈이 떠졌다. 살아있다.
숨이 쉬어지고 앞이 보이고 배가 고프다.
죽고만 싶던 사람이 배가 고프면 또 참기가 힘들었다.
다시 배고픔을 잊기 위해 뭐라도 찾아 먹고 살아있음이 괴로워서 술을 마시고 오늘 용기 내 죽어볼까 몇십 번 고민만 하다가 엄마가 생각나서 울다가 잠들고 그렇게 3주가 지났다.
물론 이선우가 출근을 하고 집을 나가면
지갑만 들고 어디든 도망가면 되지 않을까 고민도 많이 했다.
근데 두려웠다. 지갑에 내 돈이라고 해야 고작 몇만 원... 엄마에게 갈 수도 누구에게 갈 수도 없고 그가 늘 말했듯 나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니라는 협박이 어느덧 나를 가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나약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3주 정도 지난 어느 날 이선우는 낮에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그는 저녁 일찍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지? 싶으면서 또 술에 취해 온 이선우에게 내 몸은 자동으로 반응했다.
공포......
그는 나에게
"야!!! 이리 와봐!!! "
소리를 지르며 황토색 서류 봉투를 앞에 내던졌다.
나는 멍하니 서있었고 그는 또 소리를 질렀다.
"내가 네년 때문에 처 자식 다 버리고 왔어 이년아!
자! 확인해 봐! 이혼 서류야! 앞으로 이제 니년 데리고 살려고 내 자식새끼 다 버리고 왔다고!! 이게 그 증거야! "
"......"
그동안 나는 서류상이든 뭐든
이혼하지 않은 유부남이랑 살고 있던 거였나!
"아니 그게 뭔 말이야! 무슨 이혼서류! 이혼은 나 만나기 전에 했다며! 근데 뭘 이제 갖고 와서 난리야!!!"
"애새끼들한테 아빠 없이 있게 하고 싶지 않아서
이혼 서류는 애들 크면 정리하려고 했었어.
근데 이제 니년이랑 살려면 정리해야 할거 아냐!
너도 맨날 나한테 뭐냐고 시위하고 있잖아!
자 이제 속 시원하지! 그래 인생 뭐 있냐! 어차피 같이 살지도 않는 거, 씨팔 이제 너랑 혼인신고 하고 네가 나 데리고 살면 되잖아! 네가 내 인생 망쳤으니까!"
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나....
춘천 김선배 형수가 말한 게 이거였나?
그날 선배가 말한 정리 잘했냐 물어본 게 이거였구나!
하,
나도 내가 어릴 때부터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인생에 '인'자도 모르면서 나도 고생할 만큼 살았다고 어지간해서 인생 돌아가는 거 잘 안다고 주접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번뜩 정신이 차려졌다.
내 20대 초반부터 지금 27살 7년의 시간 동안 저런 개새끼한테 놀아나며 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나는 살아야 했다.
죽기는 왜 죽어 병신같이.
그 용기로 나는 이 개자식 품에서 벗어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미친 듯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저 인간이랑 앞으로의 삶을 상상하니 그저 컴컴하고 미세한 불빛하나 없는 어둠만 보일 뿐 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저 끝도 보이지 않는 어두움.
나는 살아야 했다.
살아내야 했다.
저런 인간 때문에 가장 중요한 20대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고 죽어 없어질 만큼 그런 하찮은 내가 아니라고 마음 깊숙이에서 울리고 있었고 그날 나는 굳게 결심했다.
죽든 살든 벗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