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제31회 BNK경남은행 백일장 차상 수상작

by 천천히 한걸음

오늘 회사에 가서 사직원을 제출하고 기념패와 꽃다발을 받고 왔어. 좋아 하던 초밥집에서 점심 환송회까지 하고 집으로 돌아왔지. 오는 길에 당신한테 전화를 할까 하다 음악을 크게 트는 것으로 대신했어. 왜 그랬을까? 언제나 무슨 일이든 제일 먼저 전화해서 조잘대는데 말이야. 받은 꽃과 팀원들과의 기념

사진도 친구들에게만 보내서 이런저런 넋두리를 했어.

육아휴직을 하겠다고 해놓고선 복직 대신 사직을 택한 선택을 한 번도 비난하지 않은 당신에게 차마 환송회 소식을 전하지는 못하겠더라고.

십분 정도 되는 짧은 거리를 오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훑고 지나가던지 평소 다니던 길인데도 운전이 조심스러웠어.


이제 십 년이네 우리가 처음 소개로 만나 초등학생 아이를 길러내기까지 말이야. 처음 만난 날 기억나지? 우리는 아직도 그날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를 가지고 깔깔대곤 하지.

작고 통통한 남녀 둘이 서로 잘 보이겠다고 잔뜩 멋을 부리고 만나서 스파게티를 먹고 드라이브를 하고, 말도 안 되는 개그를 했었어. 이 세상 남녀 소개팅의 표준코스를 밟은 그 날 이었지만 우리에겐 특별히 서로가 더 웃겼었던 날로 단골 안주거리를 제공해준 날이지.


길지 않은 연애 동안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 당신이 너무 이상하고 다행스러웠어.

엄마와 단둘이 살던 월세집에 처음 데려 갔던 겨울날 부엌 싱크대에 물이 얼어 있었어. 내 기억 속의

집은 언제나 물이 얼었고, 자기전에 물을 졸졸 틀어놓아야만 했었기에 난 그게 이상한 건 줄도 몰랐어.그럼에도 어쩐지 지나치게 누런 장판이 부끄러워지려는 찰나 싱크대 얼음이 꼭 고드름 같다고 신기해하며 웃던 당신 모습을 나는 종종 생각해.

그러게 고드름이네 하면서 같이 웃게 해 주던 그

얼굴 말이야.


그렇게 우리가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당신 집에 식사하러 가는 날 나도 뭔가를 처음 봤지. 비밀번호가 있는 아파트 현관 입구, 쇠로 된 열쇠가 아닌 도어락이 있는 아파트.

일층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집을 나는 그날 처음 가본 거지.


살아온 환경이 달랐다고 우리가 설마 다른 존재였을까? 우리는 같이 나눌 수 있는게 많은 사람들이었어.

스파게티를 먹을 때 샐러드를 인분 외에 따로 시키는 것이 당연지사임을 알았고, 김창완 밴드 음악을 차 안에서 들으면 그대로 우리만의 우주가 생기는 것을 알았고, 삼겹살의 소주는 그 어떤 거짓말 탐지기보다 우리를 솔직하게 한다는 것도 알았지.


그렇게 길지 않던 연애 후 인근의 결혼식장에서

동시입장을 하며 우리는 부부의 길로 들어섰어.

이전에 몰랐던 서로의 다름을 느껴가며 그 다름을 맞추려고 내지 않던 큰소리를 내어 가며, 일정 부분 서로를 포기한 채 살아내기 시작했지.


맞벌이라는 게 그렇게 힘들지 모르고 아이까지 일찍 가진 우리 참 힘들었었어 그렇지? 아침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두 사람 사이에 치인 아이와 양쪽 어머니들 사이에서 정작 가장 치이고 아픈 건 우리 둘 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퇴근길 저녁에 땀에 젖은 앞머리를 넘기며 애꿎은 당신만 원망했었어."왜 이렇게 늦어? 오빠만 일해? 나도 야근해야 돼." 같은 전화 통화와 “오빠 ㅇㅇ이 씻겨, 밥 먹여”와 같은 대화가 전부이던 시절을 죽을힘을 다해 버텼지.


버텨낸 시간만큼 착하고 튼튼한 아이는 잘 자라 주었고, 아이를 먹이고 씻기던 시간에 이제 우리는 얼큰하게 끓인 찌개에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실 수 있게 되었지.



그때쯤이었을 거야. 자꾸 지난 시절들을 되돌아보게 되던 때가

따지고 보면 아이 초등학교 입학은 이제 시작을 뜻하는데, 나는 지난 시절들을 자꾸 되돌아보게 되더라. 그 속에 항상 당신에 대한 미안함이 떠올라.

시부모님께 서운한 것도 내가 나에게 서운한 것도 모두 당신 탓으로 돌리며 투정 부렸던 내 모습이

드라마 한 장면처럼 생생해지는 날은 당신이 일찍 퇴근하고 집으로 와주었으면 하고 맛있는 저녁 준비를 하곤 해.


아이의 초등 입학을 위해 휴직 일 년을 시작하자 내 삶에 새로운 한 꼭지가 생기는 기분이었어.

밤에 잠들기 전의 가슴 두근거림이 없어졌고,

아이 손을 잡고 학교에 들여보내고

돌아서는 길에 아침햇살을 야금야금 떠먹었지.


바뀌는 계절의 냄새를 실컷 맡고 나서부터 다시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어. 아이 손을 잡을 수 있을 때 ,아직 내 손을 잡기 원할 때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어.


처음 퇴사 이야기를 꺼냈을 때를 생각해.

아마 나였다면 그렇게 말해주지 못했을 당신 특유의 그 선함과 차분함. 그렇게 퇴사를 결정하고

나니 왠지 모르게 꼭 배신자가 된 것 같더라.


다달이 대출금을 갚고 생활비를 마련하던 동지에서, 뒤에서 탄환을 장전하고 군사 식량을 준비하는 준비병이 된 기분이 들었다고 하면 조금 우스울까?


식재료를 아끼려고 소분해서 냉동할 때마다 당신 생각을 해. 쓰지 않는 멀티탭 전원을 오프 시키려고 집구석구석을 돌아다닐 때마다 당신 생각을 해.

유난희 굵고 넓은 어깨에 내가 얹어 놓은 짐을 생각해.


봄이야.

일 년 전과 많이 다른 봄이야.

많은 것이 달라졌고 앞으로 달라질게 더 많은 계절의 시작이야.

일찍 퇴근한다면 봄나물 무침에 막걸리 한잔 기울였으면 해


식탁 위에 퇴직기념 꽃은 그냥 꽃으로만 보자 우리 둘 다.그러니까 돌리고 돌려 이야기해.

고마워 박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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