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이야기 공모전 응모작]

너와 나의 책 이야기

by 천천히 한걸음

" 나 오늘 oo이 좀 울릴 거다. 니 아버님 올 때까지 울릴 거야"

급하게 소집된 잠깐의 회의 , 30여분 되는 그 시간 동안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 열 통이 찍혀 있었다. 몸이 땅으로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첫마디였다.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아이를 돌보고 계신 어머니의 전화 첫마디였다. 믿을 수 없었지만 믿어야 했다.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발음도 믿어야 했다.


그날 이후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일을 한다는 것의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다.

뜨거운 연두부를 맨손에 받아 들고 서 있는 것 같은 나날이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을 30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곧 첫 아이가 생겼다.

한 직장에서 10년이 넘게 일을 하면서 줄곧 농담처럼 옆에 짝꿍들과 그런 얘기들을 했었다.

난 아이가 생기면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어도 좋으니까 꼭 집에서 육아에 전념할 거야. 이런 지긋지긋한 서류더미 더 안 보고 내 애는 내가 직접 키워야지.


아이는 생겼고 라면은 자주 먹었고 육아에 전념은 했지만 지긋지긋한 서류 더미는 두 배의 양으로 함께 하고 있었다. 생계의 문제는 육아를 넘어설 수 없었고 일정한 급여가 우리 생활에 가져다주는 윤택 감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시어머니 음주 육아 거부 사건( 그날의 사건과 감정들을 기사 헤드라인 뽑듯 써보면 그 일과의 거리감이 생긴다. 조금 괜찮아지는 길인 것도 같다.) 이후 아이의 육아는 어린이집,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어머니, 친정엄마, 육아 도우미 등등 대한민국 직장 부모의 선택지를 돌아가며 밟고 있었다.

뒤돌아 보면 이해가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아이 5살 무렵까지 자동차를 사지 않고 버텼던 게 제일이 아닐까 싶다. 오후 5시 통근버스를 타고 퇴근하여 다시 아이를 데리고 걸어서 집에 가는 무모한 생활을 2년 넘게 이어갔다. 직장에서 입던 블라우스와 옥죄는 치마는 땀으로 젖고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를 고정시킬 실핀이라도 없는 날엔 짜증이 더해만 갔다.


웃는 아이 얼굴도 더위와 추위 속의 귀가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짜증의 연속이었고, 업무가 많아 늘 늦는 남편에 대한 원망은 말할 수 없이 쌓여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안 되겠다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안 되겠다 싶었던 어느 날 중에 한날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메신저 대화를 이어가다 책 육아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었다.


결혼 전부터 책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잘 읽어 내던 나였었는데 어느새 핑곗거릴 찾아

책을 안 읽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가슴이 조금 뛰었다. 조그만 숨구멍을 찾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유명한 육아서는 모조리 찾아 읽었다.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같이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늘어갔다. 비례해서 쌓여가는 빨래와 육체의 피곤은 흐린 눈으로 못 본 척했다.


지친 하루 끝 침대도 없이 요를 깔고 둘이서 누워 자는 안방에 북 스탠드 불을 켠다.

어느 영화에서 봤던 문을 열면 다른 시공간이 열리는 장면.

아이와 나에게는 스탠드 불이 켜지는 순간이 다른 공간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때로는 기뻤던 하루, 그보다 많았던 힘들었던 하루 끝 피난처는 그 공간이었다.

정직하게는 육신의 고됨으로 피난처가 아닌 출근처(?)가 될 때도 물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와 나의 책나라 여행은 계속되었다.

많은 책을 읽어주기보다, 하나의 책을 질리도록 반복해서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독전 , 독후 활동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있긴 하지만 우리에겐 그것은 그저 놀이였다.

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 대한 미안함, 걱정, 사랑을 사그락 사그락 넘기는 책장으로 전하고 느꼈다.

정작 짧은 내용의 책이라 실제 읽는 시간보다 책 표지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길 때도 많았다.


"ㅇㅇ 아 , 이것 봐 마녀가 그려져 있는데 마녀에 대한 이야기 인가?"

"어 아니야 엄마 발 밑에 봐봐 생쥐가 있는데 생쥐에 대한 이야기 아니에요?"

"어 생쥐? 그럴 수도 있겠네.. 어 근데 우리 지난번 생쥐가 친구들한테 떼쓰는 이야기도 읽었었잖아 그게 뭐였더라?


이렇게 한 권을 읽으면 같이 읽을 책 2~3권이 뚝딱 만들어졌다.

같은 책 한 권을 다르게 읽는 신기한 놀이 방법도 생겼다.

"ㅇㅇ아, 우리 여기까지만 읽고 뒷얘기는 상상해서 말해볼까?

"엄마, 그런데 나는 여기 마녀가 조금 불쌍해요. 나쁜 사람도 착한 마음이 남아 있을 텐데 "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 엄마 생각은..."


졸린 눈과 자꾸만 처지는 팔에 힘을 주고 읽고 또 읽고 대화해 나갔다.

퇴근 후 짜증을 아이에게 쏟아낸 어느 날 밤 , 엄마와 아빠의 직장생활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로 아이에게 사과를 대신했다. 유치원에서 친구와 다툼이 있었을 때도 경계교육

도서를 읽는 것으로 넌지시 답을 던져 주었다. 세 식구 감정이 모두 뾰족해져 날카로웠던 어느 날 저녁은 감정을 주제로 잡고 집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어낼 기세로 덤볐다.

썩지도 않고 동아줄도 아닌 기적 같은 튼튼한 끈이었다. 답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숨 쉴 구멍만 있었으면 좋았을 직장맘의 한줄기 빛은 오로지 책이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중간중간 노력했던 엄마표 영어도 빛을 발해 이제는 짧은 영어책도 제법 읽어내는 사랑스러운 아이

책을 읽어서 유명 블로그에 나오는 집들처럼 육아가 마냥 즐거워지고 , 사랑스러워진 것은 아니다.

책을 많이 읽어 특별히 학습능력이 뛰어나고 특출한 것도 물론 아니다.

다만, 그 수많은 밤 이만 원짜리 북스탠드를 2개 갈아치울 동안

아이와 여행했던 그 수많은 나라들, 만났던 위인들, 나누었던 생각들

읽어주다 잠꼬대를 하는 나를 바라보며 깔깔거리던 그 말간 얼굴들

노란 불빛 아래 가득 찾던 그 시간들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평생 잊을 수 있을까?

외풍이 심했던 신혼집 , 커튼을 두 개씩 치고 읽고 또 읽었던 그 밤들

탯줄 다음에 아이와 나 사이에 이어진 책의 끈, 오직 우리 둘만 고유한 그 시간들


오늘 저녁은 아기 때 읽던 책 특집으로 해봐야겠다.

학교 다녀올 아이 얼굴이 벌써 떠오른다.

ㅇㅇ아 책 고르자. 우리 세계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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