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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박꽃 Jul 05. 2024

이유 있는 수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탁월한 선택을 하셨군요!

한 대학의 평생교육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어른을 위한 그림책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첫날 찾아갔던 그 길이 내비게이션처럼 몸에 입력되어 늘 가던 길로 갔다. 나는 매사에 그런 편이다. 한 번 정해지면 웬만해서는 바꾸지를 않는다. 거기에서 느끼는 안정감이 있다. 6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일찍 도착해 생긴 시간 여유가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늦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러면 어때라는 생각이 힘이 셌다. 50m 정도나 갔을까, 한 아름으로는 도저히 안을 수 없이 굵고 키가 큰 몇 그루의 도토리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가 바로 앞에 보였다. 이렇게 큰 나무가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더 놀란 건 나무들 사이로 노란 불빛을 내는 카페가 있다는 거였다.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여기에 카페가 있었다고?"혼잣말을 하며 나무 덱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빨려 들어갔다는 표현이 맞겠다. 중년으로 보이는 주인장은 상쾌한 웃음과 인사말로 맞이하고, 음악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ost였다. 

아침 식사 대용으로 고구마라테를 주문했다.

"어우, 오늘은 왜 내가 좋아하는 것만 주문들을 하실까? 하! 하! 하! 제가 좋아하는 걸 주문하셔서 거품까지 신경 써 만들었어요. 맛있게 드세요."

"1년 가까이 오는데 이곳에 카페가 있는 줄 몰랐어요."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학생들 아니면 장사를 할 수가 없네요. 하! 하! 하!"


하늘이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바람이 장난치듯 슬쩍 머리칼을 만지고 하늘은 파랗고 하얀 구름은 산책 나온 것처럼 걸음이 여유롭다. 도토리나무가 곁에 있으니 산으로 순간이동한 듯 느껴져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몸과 마음의 긴장이 후루루 풀리고 편안해지며 이런 호사가 있나 했다. 누군가 바짝 붙어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자연이 풍기는 향기, 느낌, 바람에 웃음이 줄줄 흘렸다.


그다음 주에는 비가 내렸다. 비까지 내리니 빨리 가서 5분이라도 더 있고 싶은데 발이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우 발이 왜 이렇게 느린 거야 웃음끼 밴 혼잣말도 했다. 발걸음에 설렘이 대롱대롱 매달렸다. 주인장은 고구마라테를 내주며 밝게 웃었다.

"뜨거워요, 조심하세요. 그런데 맛있어요."

"네. 그래서 또 왔어요. 밖에서 천천히 먹고 갈게요"

"네. 지난주에도 한참 앉았다 가셨죠? 오늘은 더 좋아요" 윙크 같은 미소가 선물이다. 

음악을 잠시 꺼 둔 건 주인장의 센스가 아니었을까 싶다. 


빗물이 뛰노는 모양을 보다 고개를 들었다. 내가 늘 다니는 길이 바로 코앞이다. 몰랐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목적지만 봤을지도 모르겠다. 정상에 빨리 오르려 시간계산하며 앞만 보고 걸었던 20대의 등산이 떠올랐다. 그땐 정상에 빨리 오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느 날 선배와 등산을 하다 한소리를 들었다.

"너 그렇게 앞만 보고 빨리 걸을 거면 등산을 하지 말고 육상을 해보는 게 어때? 천천히 걸으며 옆도 보고 위도 봐야 눈에 뭐가 들어오지. 등산이 꼭 등산이 목적은 아닌 거다." 그때부터 속도를 줄이고 옆을 보기 시작했다.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오르니 전보다 힘도 덜 든다고 느껴졌다. 인생을 사는 것도 힘 빼고 같은 속도로 걷는 게 낫겠다는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도 했었다.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발걸음을 옮기는 걸 만만하게 떠나는 여행이라고 표현해 본다. 일상에서의 소심한 경로이탈이 닫혀있던 창문을 활짝 열고 공기를 바꾸듯 마음을 환기시키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장난꾸러기 아이의 용기 있는 목소리 덕에 깨알만 한 호기심은 힘을 얻는다. 언제부턴가 빗물 웅덩이를 보면 피해 걸었다. 그건 내 안의 동심을 주눅 들게 하는 거였다. 빗물에 발을 담가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재미있어하던 어린 나에게 다시 기회를 줘야겠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수록 익숙해진 공간에서 벗어나는 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생경한 것이 익숙질 때까지의 불편함을 구태여 감수해야 하나 한다. 삶을 얼추 안다는 오만이 호기심 어린 마음을 꼬깃꼬깃 접어둔 지 오래다. 어제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면 시선을 어제와 다른 곳에 두거나 자세히 보거나 아예 다른 길로 걸어 보는 건 멍해져 있던 생각을 자극해 깨어나게 한다. 곁길로 발길을 옮겨보자. 상상도 못 한 재미가 거기에 있을 수 있다. 사는데 재미가 빠지면 무슨 맛일까. 가파른 언덕길이라 피했던 그 길이 인생 샷으로 추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 간직하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중 아이의 마음과 호기심이 있다.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이유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것처럼 맑았던 아이적의 내 눈동자가 그립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곁길에서 발견의 기쁨을 느낄 때 아이의 눈빛으로 생기발랄하다. 내면의 아이는 손끝이 닿는 구석구석을 누비는 여행가나 모험가로 행복할 수 있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탁월한 선택을 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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