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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Aug 04. 2019

상수, 브렛피자

피자의 왕

어제는 36도를 찍으며 더위가 맹위를 떨치더니 오늘은 하루 사이에 조금 나아졌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더운 날씨를 헤치고 점심을 먹으러 집을 나섰다. 분명히 집도 양쪽으로 바람이 통하는 구조인데 한여름 더위는 어쩔 수 없나보다. 밖에 나오면 항상 조금은 더 시원하다. 남편은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지 내가 옆에서 하는 말에도 별로 대꾸가 없다. 혼자 생각에 빠지면 으레 그러듯이 웃는 얼굴로 앞을 보며 걷고는 있지만 생각은 완전히 딴 곳에 가있다.

오늘은 상수역으로 간다. 서울에서 가장 좋은 동네 중 하나. 상수역-합정역 라인. 홍대도 그새 너무 커져버렸다. 예전에는 홍대 앞 중심부에 개성있는 가게들이 주로 모여있었겠지만 점차 확산되면서 예전에는 주택가였을 것 같은 이 동네, 그리고 연남동, 망원동 쪽이 더 분위기가 색다르고 좋아졌다. 저렴함, 다양함, 그리고 가게 주인의 개성과 퀄리티까지 더해져서 이젠 강남을 가지 못하게 됐다.

오늘 가는 피자가게도 그런 곳이다. 원래는 서촌에 근사하게 오픈했던 곳이다. 그곳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 그곳은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게 한옥건물을 아름답게 리모델링해서 운영했다. 처음 갔는데 인상적인 걸 넘어서 놀라울 정도였다. 그냥 일반적인 그 동네 한옥 컨셉의 가게들과는 좀 다르게 너무 세련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도 그렇고 메뉴도 그렇고 음식의 수준도 나는 도산공원 혹은 좀 더 나아가 뉴욕이나 런던의 파인다이닝 식당에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거기 맞춰서였는지 유독 그날 저녁엔 유복한 강남 도련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끄는 커플들이 식당을 채우고 있었다. 문화는 참 재미있다. 사람의 외양과 소지품만 봐도 그 사람의 사회경제학적인 지위를 알 수 있다. 가끔은 표정이나 얼굴 선, 인상에서조차 그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아쉬운 것 없이 고급문화만을 소비하면서 자란, 선이 가늘고 살짝 새침한 그런 분위기가. 어쨌든 그 날 저녁이 유독 그랬다. 반면에 푸근하고 해맑은 기운을 가진 남편이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그런 얘기를 했다가 그만 시무룩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때 그 주방장이 그곳을 접고 오랜만에 다시 식당을 낸 것이 바로 이 상수역. 이 동네에 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반가웠다. 음식의 퀄리티는 물론이고 어딘지 자유롭고 부담없는 분위기의 새로운 식당으로 왔을 거 같은 기대에. 물론 피자라면 죽고 못살 정도로 좋아하는 남편은 대환영이었다. 그때 그 식당이 새로 오픈한 거라고 하면서 옛날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 남편은 생각난다며 끼득끼득 웃었다.

12시 반에 들어갔는데 이미 식당은 만석으로 문 바로 앞의 바 자리 2개만 남아있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착석했다. 인터넷의 발달로 요식업계는 정말 많이 변했다. 다 알수도 없는 서울 곳곳의 골목 안쪽에 가게를 내도 SNS를 통해 너무나 신속하게 모두에게 식당 정보가 퍼져나간다. 지도와 네비를 보고 찾아가니 가는 길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건 홍보용으로 쓰일 예쁜 식당 모습과 음식 사진뿐. 이 피자집 같은 경우 누가 어디서 냈던 거라는 정보도 역시 SNS를 통해 팍팍 전파된 모양이다. 연지 얼마 안된거 같은데 이미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어둡고 세련된, 아주 모던하게 꾸몄던 그전 가게와는 달리 여기는 너무나 밝은 완전한 오픈형 키친을 가진 공간이었다. 그야말로 상수역에 어울리는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어쩌다 바 자리에 앉으니 바로 앞에 커다란 화덕피자와 파스타를 지글지글 요리하는 렌지, 그리고 바쁘게 피자를 만들어 화덕에 넣는 주방장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신기했다. 주방을 이렇게까지 넓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화덕 속에서 활활 타는 장작불, 팬 위에서 지글거리는 파스타가 꼭 이태리 농가의 부엌 식탁에 앉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난 아무 말도 안한 채 그냥 앞의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는데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바로 앞에는 미리 준비해 놓은 말캉한 피자 도우 반죽들이 예쁜 모습으로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하나씩 토핑을 얹어 화덕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보던 중 가장 예쁜 반죽이었다. 생크림처럼 하얗고 말캉말캉한 덩어리들이 어찌나 생기 있어 보이던지. 그리고 너무나 빠른 손으로 마르게리타, 페퍼로니, 트러플, 버섯피자를 만들어 척척 구워내는 주방장의 손길. 먹는 행위는 사람의 가장 원초적이고 오래된 행위. 그 자체로 편안함을, 만족감을 준다. 좋은 식재료를 구해 맛있게 요리해내는 과정은 사람을 풍요롭게 채워준다.

서촌에서 먹었던 그 맛 그대로. 요리에 대한 정성스런 메모가 함께 딸려나오는 것도 그대로.

그간 먹었던 피자와 파스타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들만한 맛이었다. 자유로운 상수역이지만 음식은 파인다이닝식당의 수준이었다. 정말이지 가격이 아깝지 않은.

바로 옆 커피집과 라멘집은 이곳에서도 꽤 연식이 된 곳들로 평일 점심때도 가끔 기분전환을 위해 오는 곳이다.

커피를 시원하게 마시는데 남편은 식당에서 찍었던 영상을 편집해서 SNS에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이런 컨텐츠 생산을 참 좋아한다. 식당은 내가 찍고 컨텐츠는 그가 올린다. 갑자기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 팔로워들은 남편의 계정을 보면서 이 사람 가는 곳 괜찮다고 하고 있을테니.

컨텐츠는 좋지만 SNS는 싫은 나는 이 시대의 트렌드 뒤에 숨어서 계속 앓고만 있다. 이미지와 짧은 포스팅은 왠지 싫고 글로 이야기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고 나아가서는 살아 움직이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왜 나는 계속 존재없는 인간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세계는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고 현실 속에 나는 존재가 없다. 아마도 나는 머릿속의 세계를 조금 느끼고 위안을 받기 위해 가끔씩 상수역이라는 이 동네로 오곤 했던 것 같다. 뭐라도 쓰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상수역의 이 자유롭고 다양한 컨텐츠 같은 그런 이야기를.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처럼 선택지 없이 틀에 맞춰서 살아온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5분씩 기분전환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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