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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Jul 11. 2020

슬기로운 의사생활

그간 TV를 잘 안 봤었는데 올해 코로나19라는 전례없는 위기상황 속에 자연스럽게 나도 TV를 많이 보게 되었다. 내가 올드한 취향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옛날에 너무나 재밌게 봤었던 젊은이의 양지라든가 카이스트 이런 드라마 이후로는 요새 드라마는 어딘지 모르게 잘 안 맞아서 끊어진 지가 정말 오래됐었다.

그랬다가 1월에 우연히 스토브리그를 재밌게 보고 우리나라 드라마도 뭔가 진화하고 있구나, 하며 검사내전과 비밀의 숲을 연달아 보았다. 역시나 개인 취향인데 검사내전은 재밌게 봤으나 그보다 더욱 여러 명의 추천을 받았던 비밀의 숲은 딱히 즐겁지는 않았다. 살인 사건 하나만 파기보다는 나는 다양한 인간관계와 사람들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거 같다. 게다가 좀 밝고 이상주의적인 관점을 선호하기도 하고.

비밀의 숲을 힘겹게 다 보고 나선 또 지쳤는지 한참 쉬다가 이번에 다시 보게 된 것이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검사내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것도 밝고 따뜻한 그리고 무엇보다 끈끈한 인간관계가 강조된 그런 드라마. 예전 하얀거탑과 비교하면 확실히 배우들의 매력이나 분위기가 매우 다른데 이건 새로운 세대가 출연하는 요즘 드라마라서 그런거 같다. 

사실 모든 드라마 중에 내가 가장 좋았고 지금도 보고 또 보게되는 드라마는 웨스트윙이다. 컨텐츠의 다양함에 있어서도 쉽게 따라가기 힘든데다가 제일 좋았던 포인트는 거기에 나온 사람들의 전문적인 커리어와 끈끈한 우정이었다. 사실 그게 어렸을 때부터 내가 꿈꾸었던 두 가지였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런면에서 아주 흡사했다. 무대와 분위기만 다를 뿐. 예전엔 로망을 보는 느낌으로 즐거웠지만 이제는 어딘가 씁쓸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연배도 비슷한 99학번, 한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서 그런 걸까. 40이 다 되어가는 나이면 바로 내가 옛날에 꿈꾸었던 그런 것들을 이제 현실로 한참 경험해야 할 때라서 그렇다. 그러나 지금 나의 현실은 너무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전문직의 꽃이라는 의사는 지금 내가 고3으로 돌아가더라도 지망하지 못할 거 같다만, 그럼 도대체 내가 어떤 길 어떤 커리어를 추구했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름대로 현실에 필요한 부분을 감안해서 지금의 직장을 선택하고 힘들어도 꾸역꾸역 다녀왔는데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월급 통장 뿐이고 그나마도 내가 살 수 있는 집 한 채 마련하기에도 버거운 수준이다. 그러나 내가 진짜 내가 흥미있는 분야를 찾아 용감하게 나갔더라면 지금 나의 생활과 현실은 어땠을지 알 수 없다. 

용감하게 이상과 소신만을 쫓아가라고 말하기엔 우리 세대가 살아가는 현실은 이미 많이 팍팍하다.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을 때 각자가 어느 정도의 현실적 기반을 마련하고 성과를 내며 사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어느 정도의 안정을 잡고 났더니 나에게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나만의 컨텐츠나 분야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동질감을 가지고 일상을 함께 나눠가는 친구나 동료 그룹도 없다.

노력이나 판단력이 매우 부족해서, 결정적인 실수를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아마도 대다수의 같은 또래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살 거라고도 생각된다. 그래서 그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나처럼 따뜻하고 끈끈한 인간관계가 설정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낄 것이다. 그나마 전문성이나 커리어를 잡은 사람들은 훨씬 처지가 나을 것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말도 있지만 어느 때에는 생계를 해결하는 이 경제적 독립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지다가도 아무것도 쌓이는 것 없이 마구 흘러가는 세월이 무섭기도 하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새로운 시대는 더욱 새롭고 차가울 것만 같다. 그 속에서 나의 기둥으로 삼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 참으로 큰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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