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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Jul 11. 2020

세상의 소금

내가 일상생활에서 예민한 부분 중의 하나가 물과 관련된 것이다. 물이 시원하게 나와야 하고 또 시원하게 내려가야 한다. 수압과 배수는 집에서 누구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일 것이다. 내 생각에 나는 조금 더 시원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어쨌든 그래서 신축 아파트에 들어온 것이 여러 단점도 있지만 설비 면에서 좋겠거니 했다가 자잘한 하자와 고장은 물론 결정적으로 저 두 가지가 맘에 안 차서 부루퉁해 있었다.

수압이 낮은 것은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닌거 같고 새 아파트가 절수 관련 법규인지 뭔지에 따라서 한 세대당 한 번에 공급되는 물의 양이 적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일단 한 곳에서만 물을 틀었을 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수압이라서 그건 맘을 접었다. 분명히 그간 내가 살아왔던 80년대 시공 오래된 아파트 수압보다는 현저하게 약하지만...

수압은 그렇다치고 배수는 더욱 더 치명적인 부분이다. 사람도 먹는 것보다 배설이 훨씬 중요하다고 한다. 어딜 가든 노폐물과 쓰레기를 원활하게 처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화장실 세면대 물 내려가는 속도가 작년 정도부터 느려지더니 몇 주 전부터는 주방 싱크대까지 물이 안 내려가기 시작했다. 심각한 정도는 아닌데 분명히 차이를 느낄 정도라 물을 쓸 때마다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역시나 옛날 살았던 아파트 생각을 하면서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했더니 공용 면적만 담당하고 개별 세대의 일은 알아서 처리하라는 사무적인 응답에 나는 열 받아서 이를 북북 갈았다. 이럴거면 정말 허울만 좋았지 왜 신축 아파트로 오느냐며 보는 사람마다 짜증을 냈었다.

며칠 전 오전에 다른 일로 휴가를 냈다가 시간이 남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점검까지는 해주겠지만 해결은 알아서 하라는 이전의 응답이 돌아왔고 그러나 점검이라도 받아보자는 마음으로 직원들을 기다렸다. 두 명의 직원들이 곧 왔다. 점검이라 하지만 공기로 뚫는 펌프와 각종 장비도 들고 오셨다. 전화받았던 사람은 영혼 없이 사무적이었으나 방문한 직원들은 매우 친절하고 또 열심이었다. 배수관을 모두 분해하고 찬찬히 살핀 후 위에서 물을 이렇게도 부어보고 저렇게도 부어보며 기압을 이용해서 뚫어보더니 곧 물은 정상적으로 내려갔다. 다시 조립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지만 급하지 않게 서로 함께 보아주면서 끝까지 잘 마무리를 해주셨다. 오신 김에 화장실 문제도 이야기했더니 결국 세면대도 관 안쪽을 열어서 안의 노폐물을 제거해주셨다. 화장실은 누구에게도 쾌적한 공간은 아닐텐데 작업을 위해 결국에는 바닥에 눕다시피까지 하여 모든 작업을 속시원하게 해주셨다.

큰 기대 안 했는데 얼마나 고마웠는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묵은 체증이 확 뚫렸다는 표현 밖에는. 사소할지 모르나 이 배수 문제가 얼마나 하루하루 마음에 쓰이고 불편했으며, 해결되고 나자 얼마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는지. 묵묵하고 성실하게 열성을 다해서 봐주셨던 직원분들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세상엔 번지르르하고 화려한 일들도 많다. 어렵고 머리쓰는 일도 많다. 전문직, 고임금의 직업들도 많다. 그에 비하면 이런 일들은 어쩌면 가려져있고 별거 아닌 일로 취급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우리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누구도 하기 싫겠지만 누군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가끔씩 밤에 산책을 할 때마다 보이는 쓰레기 수거차량과 그 직원분들을 볼 때도 그 생각을 했었다. 아무리 더운 날에도, 코로나가 퍼져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꼭꼭 사람들이 토해내는 쓰레기를 치워주는 분들. 

직업엔 귀천이 없고 모두가 그만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독 어렵고 힘들고 하기 싫어하는 그런 일도 있다. 오늘 배수관과 나의 속을 말끔히 뚫어준 직원분들을 보며 나는 세상의 소금 같은 분들이라 생각했다. 저녁에 고마운 마음에 음료수라도 작은 걸 사서 가져갔는데 교대근무인지 그 분들은 없고 다른 분들이 고맙다며 받으셨다. 나의 고마웠던 마음이 어떻게든 그분들에게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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