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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Aug 15. 2020

여름휴가 2. 월성회관

지난번 스테이폴리오와 공간에 대한 글을 썼지만 요즘엔 여행을 계획할 때에 컨텐츠보다도 숙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확실히 20대의 에너제틱한 여행과는 결이 달라졌다. 새로운 것을 보고 경험할 때 넘치는 감흥보다는 편안한 휴식의 시간이 더 좋다. 해외를 가도 국내 다른 여행지를 가도 갈수록 느끼는 것은 컨텐츠는 서울을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가면 쇼핑의 재미가 있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지만 이제는 서울에 없는 물건이 없다. 어떤 식단으로 먹든 마시든 서울의 퀄리티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다. 이제 서울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한가로운 분위기와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더욱 숙소를 정할 때 호텔을 잡지 않게 되었다. 깔끔하고 편리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호텔은 아파트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안락하지만 개성이 없고 익명의 사람들이 같은 방에 수없이 투숙했다가 나가는. 또 하나의 호화로운 공동주택이다.

다행히 에어비앤비가 등장하고 최근 여행업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개성있는 숙소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쪽의 컨텐츠 산업이 발달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찾아보면 가격도 합리적이면서 괜찮은 나만의 공간에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편 에어비앤비가 좋은 것은 주인들과의 작은 교류가 있다는 점이다. 익명의 다수의 고객 중 하나로 물결처럼 들어왔다 나가는 호텔과는 달리 대개 이런 숙소에서는 직접 주인과 인사를 하고 그 지역에 대한 정보도 간략하나마 얻을 수 있고 일종의 인간미를 찾을 수 있어 좋다.

이번 강릉 여행 또한 숙소가 최중심이 되어 짜여졌는데 이미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월성회관이라는 숙소였다. 여름 국내여행 수요가 몰릴 것을 대비하여 좀 일찍 숙소예약을 했는데 그래서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이곳은 사천해변 근방에 위치한 작은 단독건물이다. 2층 단독주택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거 같았다. 1층은 사장님이 운영하는 카페. 2층에는 두개의 방이 있고 3층은 루프탑으로 꾸며 놓았다. 한적한 해변가라 주변은 소나무숲에 공터도 여유가 있다. 길건너는 바로 사천해변이 펼쳐지고 그 앞 울창한 소나무 숲을 따라서 우레탄이 깔린 깨끗한 산책로가 바다를 따라 이어진다. 숙소 뒷쪽으로는 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고 드문드문 집들이 몇 채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로는 대관령의 산봉우리들이 꿈처럼 솟아있고 정상에는 작은 풍력발전기들이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강릉시 부근도 아주 붐비고 복잡한 풍경은 아니지만 이곳은 정말 한가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여행의 반은 장마의 끝자락으로 비가 내렸다. 비 오는 오전에는 우산을 쓰고 해변 산책길을 쭉 걸었다. 빗속의 산책도 운치가 좋았다. 그날 오후 비는 완전히 그치고 날이 개었다. 자연을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이 숙소에는 건물 옆에 캠핑카를 본뜬 작은 트럭과 비닐포장을 둘러 세워 만든 간이 영화장이 있다. 한번 앉으면 일어날 수 없다는 빈백이 두개 놓여있고 빔 프로젝터를 건물 벽에 쏘아 영화 관람이 가능하다. 3층 루프탑에도 빈백들이 놓여있고 하얀 차양이 설치돼있다.

7시가 지나자 날은 빠르게 깜깜해졌고 우리는 사장님이 준비해주신 라라랜드를 보았다.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탁 트인 자연속에서 보는 라라랜드는 느낌이 또 달랐다. 왠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녁에 끓여주시는 해물라면은 패스했다. 아무것도 안 먹었지만 여름 밤의 청량한 분위기와 야외관람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숙소들이 다양한 인테리어를 자랑하고 있지만 역시 날씨 좋은 날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진이 취미라고 하시는 사장님이 여러가지 컨셉으로 사진을 찍어주셨고 우리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이런 날의 밤은 흘러보내기가 너무나 아깝다. 

마지막 날은 아침 일찍부터 햇빛이 쨍하게 비추었다. 이때다 싶어 책과 과일을 챙겨들고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빗속에서 봤던 경치와는 차원이 달랐다. 넓게 펼쳐진 산과 들을, 바다와 소나무 숲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마침 빌려온 책도 일본의 전원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었다. 오전 내내 빈백에 누워 느긋하게 책을 보고 경치를 바라보았다. 옆에서는 사람을 좋아하는 고양이 시루가 계속 울면서 고개를 비볐다. 서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편안하고 느긋한 시간이었다. 탁 트인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줄 줄이야. 물론 바다산책길도 가고 목장도 갔었다. 그러나 관광을 위해서 계속 걷고 보면서 즐기는 것과, 이렇게 전원 속의 집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우 다르다.

라면을 안 먹은 대신에 우리는 조식 샌드위치를 받았다. 강릉에서 추천받았던 맛집들을 하나씩 갔었지만 이미 말했듯 어떤 메뉴도 서울보다 매우 맛있고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내가 좋았던 것은 정성스럽게 싸주신 조식 샌드위치와 1층 카페에서 마신 커피였다. 이 장소가 제공해주는 힐링이 좋았던 것이다.

이번 휴가는 숙소에서 시작해서 숙소에서 끝난 휴가였다. 3일이 너무나 아쉬웠지만 이렇게 깊은 휴가의 여운을 느낀 적도 처음이었다. 이제 앞으로 여행이나 휴가를 갈 때 어떻게 할지가 더 명확해진 그런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인기가 많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월성회관은 다시 한번 꼭 가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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