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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Sep 07. 2020

아날로그의 위대함

핸드폰을 오래오래 쓰다보니 결국 배터리와 기타 성능의 저하로 이젠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또 해묵은 고민거리가 따라왔다. 바로 사진 정리. 원래 정리와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서 하루 이틀 미루다보니 결국 엄청난 규모의 추억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디지털 카메라 때와는 또 다르게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진의 장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파일 형태로 있다보니 에러, 분실 등 어느날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위험이 커져버렸다. 백업을 해야한다고, 외장하드네 클라우드네 주위에서 수없이 충고를 들었지만 난 괜히 내키지 않는 마음에 꿍꿍거리며 행동을 못하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 갑자기 결심이 굳게 선 나는 어느 정도라도 사진 백업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컴퓨터를 바꾸면서도 제대로 된 백업을 못해서 옛날 사진들은 노트북 C드라이브에 고스란히 얹혀 있었다. 정리의 대가들에게 들었던 대로 나는 무료로 제공되는 대표적인 클라우드에 나누어서 사진을 보관하기로 했다. 그래서 하나씩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차곡차곡 쌓인 사진더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십 년도 넘은 옛날 사진들은 물론이고 웨딩촬영 폴더를 옮기면서 나는 쓴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날에 즐겁게 찍었던 야외촬영이기는 했다. 그런데 천 장이 넘는 사진들이 원본 그대로 4개의 폴더에 비치되어 있었다. 모바일 청첩장을 위해서 그중 10장을 골랐었는데 어떻게 골랐는지는 물론이고 당시의 기억은 이미 흐릿해게만 느껴졌다. 종일 돌아다니는 과정을 성능 좋은 카메라로 연속촬영을 했다. 모든 장소와 심지어 이동하는 동선까지도 무성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너무 지나치게 많은 사진들 때문에 다시 들여다보게 되지도 않고 정리는 엄두도 못 냈던 것이다. 결국 이 밤에 그걸 50장으로 정리해서 보관하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난 또 한번 클라우드로 전체 이동을 시키고 주저앉았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모든 것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 쉽게 할 수 있고 결과물은 차고 넘치는데 정작 오래 남고 의미가 깊은 것들은 없다. 예전 사진관에서 찍었던 사진처럼, 혹은 아빠가 필름카메라로 정성껏 찍어주었던 사진처럼. 웨딩촬영도 작가의 정성으로 좋은 카메라를 사용해서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 사진 20장 정도를 찍어주었더라면. 그리고 그 사진들을 옛날식 앨범에 넣어 보관했더라면.

난 추억 곱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옛날 앨범 보는 것을 참 좋아했다. 대학생 되기 전까지도 집에서 종종 찢어져가는 옛날 앨범들을 보면서 빛바랜 옛날 사진들을 보고 또 봤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따뜻한 분위기가 너무나 좋았다. 사진은 추억을 전달해주는 정말 좋은 수단이다. 그렇지만 대학교에 들어가고 디지털 카메라가 유행하면서 점점 사진도 순간만을 스치고 지나가는 홍수 같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 그래도 카메라였을 땐 그날 집에 오면 컴퓨터에 바로 사진을 옮겼고 일부는 인화도 했었다. 그러나 핸드폰 시대가 열리면서는 모든 것은 다 단발성으로 변하고 말았다. 백업 얘기를 하면서도 디지털 파일로 된 사진들은 열어보지 않는다고들 말했던 것이 이미 십 년 전이다.

책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비해 가지수는 많고 너무나 깔끔하고 예쁘고 다양한데 정작 오래오래 여러 번 곱씹으며 두고 싶은 그런 것은 없다. SNS가 발달하면서는 누구나 쉽게 만들고 올리면서 창작물의 세계는 더욱 혼란스러운 바다가 되었다. 이젠 넘쳐흐르는 컨텐츠 속에서 진짜배기를 골라내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다가 아주 가끔씩은 구매를 해서 집에 두는 책들도 있지만 역시 가장 무게가 있는 책들은 고전문학이다. 

문학도, 클래식도, 락밴드도. 고전과 전설이 나오던 시기는 어느 순간엔가 끝나버렸다. 지금은 수없이 다양한 문화가 단발성으로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그런 시대가 됐다. 잘은 모르지만 디지털과 인터넷의 발달과 비슷한 흐름을 탔던 게 아닌가 싶다. 오래 걸리고 힘들지만 그만큼 오래가는 것. 그것이 아날로그의 힘인 것 같다. 무엇보다 인간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체온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오래가는 것. 그것이 아날로그의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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