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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크 Aug 08. 2021

휴가 대신 서울 산책

강북- 너무나 다양하고 멋진

올해 부서가 바뀌고서는 여러가지가 좋아졌지만 한편 업무 스케줄은 예측 불허로 흘러갔다. 상반기에는 전전긍긍해야하는 하나의 데드라인이 있어 아무런 여행계획도 잡을 수가 없었고 미리미리 예약해야 하는 우리나라 특성상 여름 휴가 초반부도 모두 날라갔다. 그러고 나서 정작 조바심냈던 상반기 데드라인이 끝나자 일정은 어설프게 붕 떠버렸다. 도대체 언제 본격적으로 일이 돌아갈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지치고 화가 난 채로 나는 되든 말든 심정으로 8월말 휴가를 예약을 해버렸다. 그때 말고는 앞쪽 날짜는 이미 차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8월이 되어도 일은 가닥이 잡히지 않았고 이번에는 덜컥 남편 쪽 스케줄이 크게 변동하면서 결국 눈물을 머금고 8월 휴가도 전부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왠만큼 좋다 싶은 곳들은 모두 예약이 다 차 있고 특별히 바쁘거나 진척도 없는 상태로 더운 여름을 무료하게 보내려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주말 아침까지 가보고 싶은 숙소들을 괜히 검색만 하다가 별 생각없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최근에 급 채식주의를 천명한 남편을 위해 을지로에 있는 비건 식당이 목적지였다. 힙지로 열풍이 분지도 오래, 강북은 동네 동네마다 다양한 모습들이 꽉꽉 차 있지만 을지로 근방은 어수선한 옛날 골목, 오래된 건물 사이의 미로 같은 느낌이 새롭다. 주로 가던 1가에서 3가에서 더 지나 여긴 4가에 가까운 곳이었다. 우래옥 외엔 거의 와본 적이 없는 듯한. 삼풍 넥서스라는 건물 옆의 골목 안쪽에 위치한 식당. 이 넥서스라는 건물도 정말 독특했다. 길쭉하게 뒤로 빠져있는 건물은 앞쪽 대림상가와 구름다리를 연결하는 것인지 공사 구조물이 길게 붙어 있고 골목 안쪽으로 길게 들어가는 길은 홍콩 영화에서 보던 뒷골목을 연상시켰다.

더워선지 휴가철이어선지 길은 한산하고 아무도 없었다. 을지로 특유의 오래된 단층 건물의 건물 3층으로 올라가자 지금 여기가 맨 앞 식당이 나타났다. 비건의 선두를 시작한다는 뜻인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널찍한 공간에 어두운 갤러리 풍의 인테리어와 바, 오픈주방이 곁들여진 감각적인 식당이었다. 비건식으로 콩고기를 사용한 라구 떡볶이에 나물 듬뿍 파스타를 시켰다. 값도 싸고 양도 푸짐하고 맛도 좋았다. 넓은 식당에 우리 말고 한 팀 뿐으로 동남아 어딘가에 여행 온 느낌이었다. 벽에는 빔프로젝터가 쏘아대는 일러스트에 재즈가 흐르고. 주인장께서는 잘은 모르겠지만 예술업계 종사하시다가 식당을 연 게 아닌가 싶었다.

기분 좋게 밥을 먹고 다시 삼풍건물 앞으로 나오자 바로 앞 대림상가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는 이름도 유명한 호랑이와 챔프커피가 있다. 리스트엔 한참전에 올렸지만 평일에도 갔다가 몇 번 실패했다는 얘기들을 듣고 아예 시도도 안해봤던 곳들이다. 토요일 점심인데도 이상하게 한산한 거리를 보고 오늘이다, 싶어 올라가보았다. 사실 듣기론 세운상가 윗쪽 노천 분위기가 그리 좋다더라는 거였는데 왜 여긴 대림상가지. 입구도 잘 모르겠고 쭈뼛거리고 서 있자 경비아저씨가 오시더니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셨다. 공사장 같은 골목 안쪽의 높직한 계단을 올라가니 건물 3층에 말로만 듣던 널찍한 상가복도와 야외 공간이 펼쳐졌다. 이렇게 여유공간이 널찍하게 있는 것조차도 옛날 건물에서나 볼 법한 새로운 광경이라 오 이런 거였구나 하며 구경을 시작했다. 호랑이커피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뿐 아니라 옆쪽엔 아기자기한 요즘 감성의 가게들이 이미 많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울시에서 한 건지 건물 자체적으로 한건지 오래된 건물 복도의 바깥 쪽으로는 새롭게 공사를 해서 전시 공간도 만들어 놓고 작은 회랑과 엘리베이터도 설치가 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신구의 조화였다. 바깥으로는 오래된 양철 지붕들과 청계천이 멀리 보였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호랑이커피도 오늘은 여유가 있었다. 홍콩 뒷골목 같은 이 세운상가 윗쪽에 자리잡은 자그마한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좁은 공간이 1920년대 감성으로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 내가 젤 좋아하는 이 레트로 바이브. 어두운 원목에 책과 오디오 각종 액자와 장식들이 빼곡하게 차있고 조그만 테이블에는 예스러운 꽃무늬 테이블보가 씌워져 있었다. 파리 같기도 하고 경성 같기도 한 이 시대 분위기. 너무 좋다. 그 시대 풍의 재즈가 살랑살랑 흘러나오고 안쪽은 에어컨이 돌아가 시원했다. 이 어둑하고 레트로한 공간과 바깥의 찌는 듯한 더위 그리고 오래된 건물들의 대비가 참 좋았다. 이래서 유명하구나.

커피를 마시다보니 어디선가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줄을 서더니 어느새 카페는 안쪽 바깥쪽이 꽉 차버렸다. 유명세는 알고 왔으니 이제 우린 빨리 자리 비워줘야겠다 싶어 밖으로 나왔다. 반대쪽으로 쭉 걸어가보았다. 옆집은 구움과자점. 또 옆집은 작은 철학 전문서점(!). 언뜻 블로그에서 보았던 시원한 저녁 노천에서 고기 구워먹으면 분위기가 그렇게도 좋다던 오래된 식당. 어느새 건물 끝인데 구름다리는 계속 이어져있었다. 밖으로 청계천이 시원하게 보였다. 아! 다리 너머가 바로 세운상가였다. 두 개가 이어져있구나. 이 두개의 오래된 상가는 구름다리와 새로 보완한 보행로가 너무 멋지게 어울렸다. 철골 구조 드러내서 지은 새 식당처럼. 세운상가 끝까지 주욱 걸어오니 그 앞이 바로 종묘였다. 한 골목 걸어갈 때마다 뭐가 하나씩 퐁퐁 튀어나오는 요 강북의 매력. 이 동네는 정말 오래되었으면서 뭔가 내용물이 알차게 집중된 그런 느낌을 준다. 예측할 수 없는 길 모양도, 작지만 알차게 구성된 지형도 너무 좋다. 굳이 레트로 바이브란 말을 쓰지 않아도 이곳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냥 안으로 직진했다. 신혼 초에 건축가 강의 프로를 보고 바로 찾아갔던 종묘. 몇 년 만인지. 도심 한가운데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은 그런 곳이다. 한낮이라 찌는 듯이 더웠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자 우거진 나무 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널찍하게 펼져진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더위가 가시고 너무 평화롭고 좋았다. 제궁까지 죽 걸었다. 공사 중이었다. 2년 전부터 공사 중이었고 올해 말까지라고 했다. 우리가 온지도 3년이 더 됐나 보다, 하면서 앞쪽 전각 그늘에 앉았다. 관리인 아저씨도 한가롭게 앉아 계시고 그 외에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습도는 낮은 편이었다. 그늘에 앉으니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파노라마처럼 길게 길게 펼쳐진 종묘 제궁의 기와 지붕. 바깥으로는 새파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짙푸른 나무들이 펼쳐졌다. 너무나 조용하고 한여름의 색감은 청량하니 진하고 맑았다. 또다시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 오니 강원도나 남도 어딘가 먼 오지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휴가 때문에 심통이 잔뜩 났었는데 이미 멀리 휴가 와 있는 것처럼 마음이 시원해졌다. 우리는 한참을 거기에 앉아 기와 지붕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건축가들이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극찬했다던 종묘. 확실히 이곳은 간결하면서도 강한 느낌을 준다. 연말에 공사가 끝나고 나면 다음 겨울에 눈이 왔을 때 꼭 다시 와보자, 하면서 일어났다.

반나절 이리저리 걸어다닌 강북산책은 덥고 조용하고 한산하고 아름다웠다. 홍콩 같기도 하고 경성 유럽 같기도 하고 저 먼 산골의 조용한 사찰 같기도 했다. 불과 몇 km도 안되는 작은 동네 안에 이런 다양함이 공존한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예상 밖의 멋진 반나절을 보내고 나는 마음이 푸근해져서 집으로 돌아왔다. 간만에 서울의 매력을 느꼈던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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