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17년 차, 아직도 초보입니다>
영국에서 살다 보면 병원에 가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목에서 피가 나올 것 같은 기침이 2주 이상 지속되던 날, 동네 GP(General Practice)에 네 발로 기어가다시피 찾아갔다. 영국의 의료 시스템은 GP가 ‘게이트키퍼’ 역할을 한다. GP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야만 전문의를 만날 수 있다.
"집에서 일주일 쉬면 나아요. 그냥 쉬세요."
라는 소견으로 여러 번 퇴짜를 맞은 터라 이번에는 정말 쓰러질 듯한 연기를 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때까지 꺼내지 않았던 청진기를 꺼냈다.
“정말 많이 아파요.”
“네~ 잠시만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세요.” 청진기를 등에 대고 말했다.
갑자기 숨을 멈췄다가 내쉬자 기침이 끊임없이 나왔고 약간의 연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짜증이 났다. 한국에 가면 하루 만에 주사 한 방으로 멎을 기침이 2주 내내 계속되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음… 아직 폐에는 이상이 없으니 쉬시면 됩니다. 뜨거운 레몬과 생강 드시고 잠을 많이 주무세요.”
“네? 그럼 처방전은요…?”
“그냥 약국 가서 파라시타몰(진통제) 사서 드시면 됩니다.”
친절한 말투였지만, 한 시간을 기다려 응급으로 진료를 신청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질척거리는 나를 잡상인 취급하듯 몰아내는 모습을 보며 영국의 의료 시스템에 대해 화가 났다.
영국의 National Health Service (NHS) 표어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가 책임진다는 뜻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대부분의 의료 서비스가 무료다. 전액 국가 예산이 들어가다 보니 일반 감기나 가벼운 질병의 처방에는 인색하다. 피를 철철 흘리며 응급실에 들어오는 교통사고 환자 앞에서 하루 종일 기침하는 환자는 그저 ‘나일론 환자’인 것이다.
병원에서 홀대받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우수한지 침을 튀겨가며 남편에게 열변을 토했다. 그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얼어 죽을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비웃기도 했다.
처음에 너무 불편했던 영국의 의료 체제를 이해하게 되는 사건이 생겼다. 일본어를 가르쳐주던 일본인 동료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이 느려 터진 병원이 수술 날짜는 언제 잡아 줄지 괜히 내가 더 걱정되었다. 그런데 꿈쩍도 안 하던 병원 의사가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암 수술 전문의에게서 연락이 오고, 수술과 이후 방사선 치료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회사도 바로 6개월 병가 처리를 해 주었다. 2개월은 급여의 100% 다음 2개월은 50% 나머지 2개월은 기본 병가 수당이 지급되었다.
뇌종양 수술을 무료로 받은 지인, 그리스 여행 중 당한 사고로 헬기로 이송된 시어머니의 경우를 보며 영국은 생사가 달린 질병이라면 최우선 순위로 두고 국가가 보호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료 서비스는 과연 돈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기본 권리인 건강을 지키기 위해 취약한 계층을 보호하는 제도가 맞는 것일까.
보편적 의료 제도가 어쩌면 가장 공정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다녀와서 영국 의료 서비스를 욕하는 지인을 만나면 나는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나도 예전에 영국 의료 서비스 욕 많이 했거든.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 불편한 것도 많지만, 큰 병에 걸린 사람들이 돈 걱정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는 나라라면… 나는 그걸로 내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