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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은 누구의 것 인가?

by 은주

영국 유학 초창기, 영어 에세이는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문장을 잘 다듬고, 구조를 논리적으로 짜 맞추면 좋은 에세이, 좋은 논문이 나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대학원 첫 학기, 에세이 과제 제출 전, 교수가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표절(plagiarism)’이었다. 번역서를 읽고 나의 문장으로 바꾸더라도 참고문헌을 반드시 기입하라는 당부였다. 참고 문헌 없이 작성한 글은 채점 대상조차 되지 않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경고와 함께였다.


영국의 학문 환경은 저작권 문제에 매우 민감했다. 단순히 ‘표절 금지’라는 차원을 넘어, 타인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적 태도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1990년대 중반에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나로서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교수는 강의 시간의 절반을 할애하여 저작권의 중요성을 설명했고, 다양한 인용 방식도 알려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글은 개인의 창작물이자, 작가의 고뇌와 사유가 담긴 결과물이라는 인식이 깊이 박혀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저작권’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시 영국 엑시터 대학에서 회계학 석사 과정을 밟는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교수들은 한국의 회계 시스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특별한 주제로 인해 영어 실력에 비해 좋은 에세이 점수를 받았다. 학점에 관대한가?라는 생각이 들 무렵, F 학점을 받은 동기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용 부호를 표시하지 않거나 남의 생각을 표시 없이 단 한 문장이라도 썼다면, 바로 F를 받는다. 그것은 시험에서 커닝을 한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어떻게 잡아내는 거지?’

의문은 졸업 논문을 쓸 때 비로소 풀렸다. 나의 논문 주제는 ‘한국과 영국 기업 회계 구조의 차이와 그 구조 속에서의 분식회계 분석’이었다. 교수들이 한국의 자료까지 알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어 자료를 번역해서 참고문헌에 모두 포함시켰다. 30분 단위로 지도교수와 미팅이 있었던 어느 날, 미팅 방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소리, 울음소리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알고 보니, 표절이 발각되어 학위 수여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었다.

교수는 나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했다.

“참고문헌에 모두 넣었니?”

“네.”

그는 내 논문을 표절 검사 프로그램에 올려놓았다. 화면에 노란 줄이 그어졌다. 그 줄이 쳐진 부분이 모두 참고문헌에서 제대로 표시되어 있는지, 교수는 하나하나 직접 확인했다. 그 순간, 경찰서에 끌려온 범죄자가 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빠뜨린 게 있진 않을까…’

2000년대 초반, 게다가 한국어 자료조차 검출 가능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환경이 놀라웠다.

인용 표시는 했지만, 다른 논문에서 읽은 문장을 거의 그대로 요약한 것도 있었기에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수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논문은 단순히 남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 아니라, 그 안에 너의 생각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선, ‘타인의 아이디어는 철저하게 출처를 밝히고, 내 말로 다시 풀어내야 한다 ‘고 강조했다.

경제학자의 문장을 그대로 번역해 논문에 넣었다. 인용도 했고, 원문도 함께 표기했다.

“너의 생각으로 표현하는 해석이 부족해. 이 문장이 왜 중요한지를 네 말로 설명해야 해.”

이미 완벽하게 쓰인 문장을 왜 다시 써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따옴표만 붙이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내 나라 말도 아니고, 남의 나라 말을 내가 더 잘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곧 학문에서 중요한 것은 복사(copy)가 아니라, 재해석(reinterpretation)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논문을 쓸 때 진짜 해야 할 일은, 누군가의 아이디어를 단순히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의 사고 안에서 재구성하고 나의 말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저작권의 본질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작권이란, 단순한 법적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창작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 사람의 지적 자산에 대한 깊은 존중을 뜻하는 것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누군가 내 문장을 허락 없이 그대로 가져간다면 큰 상실감 느낄 것이다. 그것은 도둑질이었다.


논문을 다 쓰고 제출하던 날, 나는 그동안 인용한 모든 자료를 정리한 참고문헌 목록을 한 줄 한 줄 다시 들여다보았다. 수십 명의 이름, 수십 개의 책과 논문,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출판 연도와 페이지 번호들. 빠진 것이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것은 단지 정보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 목록은 나의 고뇌의 여정이자, 논문을 쓰는 데 도움을 준 수많은 창작자에게 보내는 존경의 인사였다.

나는 지금도 글을 쓸 때마다 저작권을 떠올린다.

내가 쓰는 이 문장이 정말 나만의 것인지, 타인의 아이디어라면 충분히 존중되었는지 혹시 누군가의 말이나 생각이 인용 표시 없이 내 글 속에 묻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자기 검열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과감히 빼는 것이 글쓴이에 대한 예의라고 믿는다.

언젠가,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그 내용을 인용할 때 그가 조심스럽게 참고문헌에 내 이름을 적어준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나의 글이 존중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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