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 한국 여자
첫 만남에서 윈스턴 처칠을 닮은 무표정한 시아버지는 나를 긴장시켰다. 부엌에서는 이안과 어머니의 이야기 소리가 작게 들렸다. 시아버지 리처드와 나만 어색하게 거실에 남겨졌다. 나를 살피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다. ‘말을 먼저 걸어야 하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리처드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바뀌었다.
“심심하면 비상벨을 당겨보렴. 아주 재미난 일이 10분 안에 펼쳐질 거다”
긴장 탓에 농담인지도 모르고 웃지 못했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빨간 줄이 늘어져 있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곳곳이 비상벨이 설치되어 있었다. 긴장이 풀어지며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리처드식 유머였다.
시댁은 브라이턴 바닷가 근처에 있는 실버타운이었다. 이곳은 스무 채 남짓한 이층 집들이 모여 단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중앙에는 사자인지 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작은 조각상이 얹힌 분수가 있었다. 소풍을 즐기며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벤치가 있었고 바닷바람이 불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공동의 공간인 커뮤니티 센터는 잘 정리된 부유한 이의 서재 같았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책장과 그 옆쪽 벽면에는 대형 TV가 있었다. 수요일마다 영화의 밤이 열리는 곳이었다. 그 외에도 요일별 차 마시는 시간, 카드 게임, 퀴즈 나이트 등 다양한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어 노년을 보내기에 좋은 장소였다. 평균 연령은 85세, 대부분 혼자이거나 부부가 함께 살았다.
집 구조는 일반 이층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방마다 비상벨이 설치되어 있었고 욕실에는 손잡이들이 벽을 따라붙어 있었다. 욕조 대신 의자와 별도의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몸이 불편한 노인들이 사용하기 편리했다.
“너희들은 너무 일찍 이런 데 들어오지 마라. 빨리 늙는 것 같다.”
70세에 입주했던 시부모님은 그곳에서는 ‘청년’이었다. 살다 보니 친하게 지내던 옆집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시어머니는 한동안 우울해했다. 매일 마주하던 얼굴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곳에서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을 기다리는 또 다른 시간일지도 모른다.
새벽녘, 침대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시어머니는 순간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이런…” 하며 안방과 거실, 주방을 허둥지둥 뒤진 끝에, 열린 욕실 문틈 사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아버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10년 넘게 한 번도 누른 적 없던 비상벨을 눌렀다.
‘삑-삑-’ 경고음이 어두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집 안을 가득 채웠고 고요한 동네를 가득 메웠다. 몇 분이 지났는지 모를 만큼 긴장된 시간이 흐른 뒤, 구급대가 도착했다. 사이렌 대신 점잖게 깜빡이는 경광등 불빛이 창문을 붉게 물들였다. 비상시 강제 개방할 도구까지 챙긴 구급대원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새벽 4시. 고요를 깨는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대. 아직 당장 오라는 건 아니지만, 준비는 해야 할지도 몰라.”
이안은 말끝을 흐리며 급히 옷을 꺼내 입었다. 단추를 제대로 채울 틈도 없이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나갈 채비를 했다. 나도 함께 가겠다고 나섰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정확하지 않으니까… 일단 집에 있어. 연락이 오면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아.”
잠든 듯 고요한 새벽,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안의 차량 엔진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서 달래려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이미 깨버린 뒤라 다시 잠들긴 힘들었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돌아왔다. 답을 들을 틈도 없이 이안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위스키에 코냑까지 곁들여 드시고 난 뒤, 시아버지는 따뜻하게 데워진 욕실 바닥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셨단다.
“구급대도 그냥 확인 만하고 돌아갔데”.
힘이 들어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손이 풀리면서 저려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최악의 상상들이 달아났다. 안도감 뒤에는 혹시나 하는 불안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행이다”라는 말이 입술까지 올라왔다. 언젠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익숙해지라고 연습시키는 건가? 이안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술만 좀 줄이시면 좋을 텐데…”
그 말에 동의했지만, 그 또한 강요할 수 없는 선택의 문제였다. 인생은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조금 일찍 가는 삶과, 절제하며 오래 사는 삶 중 과연 어떤 선택이 더 행복한 삶일까? 아마도 나는 전자를 택할 것이다.
며칠 후, 꽃바구니를 들고 시댁을 찾았다. 처음 방문했을 때 긴장으로 가득했던 그 집은 이제 한결 편안하게 느껴졌다. 시어머니의 손맛 가득한 커피와 로스트비프, 그리고 직접 구운 레몬 케이크는 시댁을 자주 찾는 이유이기도 했다. 주방은 오롯이 시어머니 마거릿의 공간이었으므로 함부로 손대거나 도와주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내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예의였다.
시아버지와 함께 서재를 둘러보던 중, 지난번의 비상벨 소동이 마음에 남았던 듯 그는 다시 농담을 건넸다.
“비상벨이 10년이 넘어서 테스트를 한번 해봤지. 다행히 아직 잘 작동하더구나.”
그는 익살스러운 윙크와 함께 웃음을 짓더니 파이프 담배를 손에 쥐고 정원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