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 한국 여자
그와 데이트 중 나를 처음으로 화나게 만든 말은 메이비(Maybe)였다. 그는 ‘노(No)’라는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싫다(Hate)’라는 단어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며, 관계에 선을 분명히 긋기보다는 늘 어중간한 단어로 여지를 남긴다. 그의 영어는 언제나 젠틀하게 들린다. 부드럽지만, 단단히 감춰진 무언가가 있는 듯한 언어는 토종 한국인인 내가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무언가를 제안할 때, 그는 단 한 번도 “원하지 않는다”거나 “이건 싫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늘 “좋아, 괜찮아, 메이비” 같은 표현으로 답했다.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함께 가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말했다.
“메이비”
'가겠다는 거야 안 가겠다는 는 거야?' 속으로 확률을 계산했다. 아마 25% 정도? 안 가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이 드러났다. 그의 “메이비”는 사실상 거절의 다른 표현이었다. 정중하지만 분명히 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왜 처음부터 분명하게 안 간다고 말하지 않았어?”
“말했잖아. 메이비.”
그 순간 억울했다. 그가 “메이비”가 곧 “노”라는 사실을 알려줬더라면, 아마 이 관계를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자친구의 나라에 안 가겠다는 그와 데이트할 이유가 있겠는가? 호감을 사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뒤 알게 된 신중한 그의 모습에 우리 사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한국이라는 낯선 땅, 새로운 문화, 가족을 만나는 자리가 두려워 처음에는 회피의 언어로 “메이비”를 선택했던 그였지만 결국 다섯 번이나 한국을 갔고, 지금은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그의 영국에서는 ‘싫다’보다 ‘좋지는 않다’, ‘못한다’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가 예의 있는 표현이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피하고, 부드러운 모서리만 남기는 방식이다. 반면 나의 한국은 도 아니면 모, 흑백이 명확하다. 좋으면 적극적이고, 싫으면 인사도 안 한다.
나는 좋은 사람에게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쏟아붓는다. 싫은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서 가끔 상처를 받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조언한다.
“20% 덜 표현하고, 50% 덜 좋아해 봐."
영국에는 이런 속담도 있다.
“Keep your friends close, and your enemies closer.”
친구는 가까이 두되,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말. 나에겐 여전히 어려운 미션이다.
가끔 언어의 완곡함은 싸움의 강도를 낮추기도 한다.
‘내가 더 심하게 짜증 내고 싶은데,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서 참는 거야.’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화를 참는 경우도 있다.
그의 “메이비” 덕분에, 우리의 관계는 조금 더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