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 한국 여자
사건은 동네 모임에서 만난 S에게 한국 여자를 소개해 주려는 나의 오지랖에서 시작되었다.
S는 키가 180cm가 넘었다. 웃을 때면 눈꼬리가 자연스럽게 좁아지며 눈웃음을 지었고, 그녀가 말을 걸면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춰주었다. 매너 좋은 남자였다. 셔츠와 바지는 언제나 반듯하게 다려져 있었으며, AI가 영국 신사를 그린다면 아마 그의 모습일 것이다. 금발을 넘기며 미소 지을 때면, ‘왜 싱글이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애사에 관심 많은 작은 체구의 동양 여자가 재미있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1년 넘게 <일 끝나고 윈저에서 만나> 모임에서 지켜본 그에게 비슷한 또래의 싱글 친구를 소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S는 좋은 사람은 아니지.”
나의 계획을 듣고 이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좋은 사람 같은데…”
자연스러운 만남이 좋겠다 싶어 런던에 사는 친구 정이를 모임에 데려갔다. 인사를 시키고 자리를 뜨려는데, S가 따라 나와 둘이 따로 한잔하자고 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관심 있는 줄 오해한 것이다. 소개팅은 결국 잘 되지 않았다. 괜히 자신 탓 같아 시무룩해진 나에게, 이안은 심술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랑 사귄다고 말은 했어?”
“응.”
“그런데도 그가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아니, 데이트가 아니라니까.”
“따로 만나는 게 데이트지! 내가 너 처음 만났을 때 샴페인 바 데려간 것도 데이트였잖아. 그건 아니야?”
“그건 데이트였지.” 첫 만남을 떠올라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떤 여자 스타일 좋아하는지, 싱글인지 물어봤더니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던데.”
“그 사람, 좋은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
웬만한 일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소개해 주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나도 지고 싶지 않아 신경질적으로 맞받아쳤다.
그렇게 모임에 나가지 않으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잊고 지냈다. 그런데 얼마 전, ‘공원 낙엽 쓸기’ 봉사활동에서 함께했던 로레인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가볍게 한 맥주 파인트 하려고 들어간 펍에서 S를 마주쳤다. 인사를 나누고 그가 자리를 뜨자, 로레인이 들려준 이야기가 나를 분노케 했다.
S와 이안은 30대에 모임에서 만나 원래 절친한 친구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안이 마음을 두고 있던 여자를 S가 가로챘고, 몇 달 만에 헤어졌다는 것이다. 이안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한 거였다. 그 뒤로 둘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했다.
그 사실도 모르고 나는 페이스북 친구라는 이유로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며 개인 톡까지 했던 것이다. 미안함과 함께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게 단순히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의 문제야? 당신, 그때 S가 싫다고 정확히 말했어야지.”
내가 다짜고짜 따지자 그는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봤다.
“그가 바람둥이인 줄 알았으면 내 친구를 소개해 주겠어? 만약 사귀었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또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겠냐고.”
한바탕 잔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의 침묵이 공평할 수는 있지만, 비겁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런 남자도 구분 못하는 여자라면, 사귀고 헤어지는 게 뭐가 문제겠어? 어차피 자신의 결정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잖아.”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들려 서늘하기까지 했다.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스쳤으나, 끝내 그는 “그가 싫다”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남의 인생에 함부로 끼어드는 오지랖은 조금 줄었지만, 여전히 세상에 관심이 많고 인간관계에 애를 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