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자, 한국 여자
눈 덮인 윈저성이 그려진 크리스마스 카드가 동네 체러티 숍 쇼윈도에 걸려 있었다. 아직 9월, 가을의 초입이건만, 그 풍경은 눈밭에 핀 개나리 같았다. 한참이나 유리 너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크리스마스를 준비해야 할 때인가?”
한국에서라면 크리스마스는 거리의 겨울 세일 간판들 사이에 끼어 있곤 했다. 종교적 기념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고, 특별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하루쯤 쉬어가는 기독교인들의 행사 같은 날이었다.
영국에서의 크리스마스는 단순히 종교적 기념일이 아니었다. 가장 큰 명절이자 관계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때로는 피곤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질지라도, 그날 덕분에 거리마다 빛이 켜지고,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가 퍼진다.
12월 첫째 주, 트리를 세우고, 그 아래에 크고 작은 선물들을 차곡차곡 쌓아둔다. 포장을 풀어보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는 크리스마스 아침 풍경이 처음엔 낯선 풍경이었다. 값비싼 물건이 아니어도 좋았다. 욕실용품, 향초, 핸드크림 같은 일상의 물건이면 충분했다. 중요한 건 정성이었고, 그것을 통해 “당신을 생각했다”는 마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선물 고르기는 언제나 쉽지 않았다. 이안과 함께 맞은 첫 크리스마스, 그가 건넨 것은 록시땅 비누가 있었다. 포장이 워낙 작아서 풀어보기 전에는 귀걸이나 목걸이를 기대했다. 순간 계산 되는 비누의 가격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또 한 선물을 가격으로 측정하는 나의 속물근성도 부끄러웠다. 그는 선물 고르는 일이 고역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생각하다가 비누가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결혼 후 시부모님의 선물을 고르며 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이안은 또다시 비누를 사려했지만 마음을 담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선물은 한 해의 사랑과 감사의 증표였다. 시부모님은 크리스마스 카드조차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카드 한 장 한 장이 인간관계의 성적표였다. 크리스마스에 집을 방문하면 벽난로 위에 카드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보며 “올해는 우리가 꽤 잘 지낸 것 같구나”라거나 “올해는 작년에 비해 줄었네”라며 스스로를 평가하곤 했다. 그녀에겐 그저 종이 한 장일뿐이었지만, 그분들에게는 삶의 지표였다. 그래서 일 년 내내 대화를 나누며 작은 취향 하나까지 귀 기울이는 일이 중요했다.
‘이런 건 아들이 좀 하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편은 여전히 아내의 취향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언젠가 결혼기념일에, 그녀가 진 앤 토닉을 좋아한다는 말을 어렴풋이 기억했던지, 마트에서 토닉워터 캔만 덜컥 열두 개를 사 와 내밀었던 적이 있었다. 진은 빠지고 토닉만 가득 쌓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웃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남편이 시부모님 선물을 챙길 리 만무했다. 대신 내가 고른 선물을 열어볼 때마다 바뀌는 그들의 눈빛에 '올 선물은 잘 골랐구나' 하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아직 가을 초입이지만, 올해는 또 어떤 선물을 받게 될까. 어떤 마음을 담아 건네게 될까. 올해 첫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