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녀 이야기

영국 남자, 한국 여자

by 은주

주황 불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건널목의 20살 남짓 보이는 여학생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비 온 뒤 달팽이 마냥 느리게 건너고 있었다. 한 손은 은색 큰 여행용 케리어와 다른 한 손에는 작은 케리어를 밀고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튼 스쿨 학생은 아닌 것 같고 근처에 대학이 있던가? 생각해 보았다. 나의 런던 상경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남들 눈에 내가 저렇게 보였겠구나.'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뚜렷한 꿈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대기업에 취업했을 때는 세상 누구보다도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 발령부서인 기획실은 서울의 이름난 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나만이 고졸이었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는커녕 두려웠다. 그래서 더 일찍 출근했고, 더 늦게 퇴근했다. 토요일과 일요일도 엑셀 파일의 숫자와 씨름했다. 아무도 해독 못하는 지시 사항이 적힌 상무의 지렁이 같은 글씨를 유일하게 읽어내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채워지지 않는 열등감과 경제적 결핍은 줄어들지 않았다. 다행히도 좋은 상사와 멘토들이 있었다. 그들의 조언과 격려 덕분에 직장을 다니며 대학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장을 손에 쥐었어도 ‘열심히 사는 고졸자’라는 주홍글씨는 따라다녔다. ‘이번생은 망했어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신을 새로운 이름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세상으로 날아가겠다고 결심했다. 돈 많이 주는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나에게 그곳은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증명서이자 순금으로 만든 수갑이었다.


청바지 네 벌과 몇 벌의 티셔츠를 들고 영국 땅을 밟았다. 설레면서도 걱정스러웠지만 동시에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곳에서 벗어난 해방감도 들었다. 직장과 공부를 병행하며 하루 네 시간도 채 못 자던 한국에 비해, 여섯 시간 잘 수 있는 대학원 생활은 천국 같았다. 오롯이 공부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소중했다. 한국 회계와 영국 회계를 비교하며 듣는 강의는 배움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다.

그 시절 나의 응원가는 영화 <국가대표>의 OST, 〈버터플라이〉였다. “어리석은 세상은 너를 몰라…”로 시작되는 노래는 나의 말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라는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언젠가 자신도 나비처럼 날아오를 거라 다짐했다. 영어가 유창한 상태로 온 것이 아니라 간신히 점수를 맞춰 시작한 유학이었기에, 수업을 따라가면서도 늘 의문이 뒤따랐다. 내년에 재수강하면 어쩌지? 학위를 못 받으면 어쩌지? 그만한 돈도, 시간도 허락되지 않아서 1년을 더 허피할 수 없었다. 절박함이 두려움을 이겼다.


누군가에게는 늦은 나이 일 수 있는 서른다섯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나에겐 인생에 너무 늦은 때란 없었다. 오히려 다시 시작하기에 적절한 순간이 있을 뿐이었다.

인생은 결핍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쉰이 넘은 지금, 그 결핍들은 결코 삶을 망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결핍은 때때로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게 했다. 결핍을 채워가기도 하며, 넘치면 덜어내기도 하며 삶은 계속된다.

초록불 운전자 신호가 바뀌자 짐을 들고 있는 여학생이 다급해 보였다. 괜찮다고 천천히 가라고 예전의 나의 상사처럼 건널목 학생에게 응원을 보냈다.



keyword
이전 08화시아버지와 비상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