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소설 글쓰기 숙제
11월, 서머타임이 끝나면 영국의 겨울은 유난히 길다.
새벽 3시, 몸은 아직 한국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창밖은 아직 깜깜했고, 비는 굵지도 가늘지도 않게, 조용히 멈출 줄 모르고 내린다. 비는 도시를 짙은 남회색으로 물들였다. 빗방울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이 비에 섞여 은빛으로 빛났다.
비가 내리 날에는 엄마는 늘 날 걱정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베란다 넘어 주차장과 벽에 붙은 뻐꾸기시계를 번갈아 보셨다. 작고 통통한 흰색 마티즈가 경비실을 통과하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가, 불빛이 4층에 멈추는 순간 안도의 미소를 지으셨다.
다시 잠들기엔 힘들 듯했다. 얼마 전 장만한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눌렀다.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적막을 깬다. 투명한 유리잔 안에서 갈색 거품이 솟아오르고, 검은 커피가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는다. 한국에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던 느긋한 어제의 아침과 사뭇 다른 오늘의 아침이다.
그리움의 싸움에서는 어제의 한국은 오늘의 영국을 언제나 이긴다.
2주간 엄마와 함께한 한국의 일상을 곱씹으며 몇 번이고 시간과 공간을 오간다.
문득 어젯밤 냉장고에 넣어둔 김치가 생각났다.
비닐도 벗기지 못한 반찬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다.
한국을 다녀오면 한동안 이 집에는 치즈 냄새 대신 김치의 시큼한 향이 머문다.
영국에 온 지 17년째지만, 한국을 다녀온 다음 날은 여전히 낯선 감정이 밀려온다.
몇 해 전부터 엄마 집 현관엔 파란 장바구니 대신 어른용 보행기가 놓여 있었다.
건강하실 때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이제 와서야 미안하게 밀려온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매일 아침 엄마와 식탁을 마주했다.
조기나 갈치구이, 소고기 건더기가 듬뿍한 미역국,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밥으로 차려진 식탁이었다. 엄마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나의 말에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다.
어느 날 아침, 엄마가 매일 앉아 혼자 식사하는 자리에 앉아보았다. 엄마는 늘 냉장고 벽면을 바라보며 식사하셨다. 그 벽에는 내 결혼사진, 언니들과 찍은 사진, 보라색 들꽃으로 장식된 베니스 운하에서 이모와 함께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엄마는 그 사진들을 보며 추억하고 기억한다고 했다. 매일 아침, 혼자 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가끔 통화를 하면 엄마는 늘 같은 말을 하신다.
“밥은 잘 먹고 다니지? 감기 걸리지 말고. 이 서방이랑 소고기 꼭 사 먹어.”
엄마는 여전히 내 밥이 걱정이다. 예전엔 잔소리 같았던 반복되는 말이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묻고 싶다.
따뜻한 머그컵을 두 손에 감싸 쥐고, 새벽의 흐릿한 오렌지빛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려본다.
그리고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잘 도착했어요.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