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라는 과목의 오답노트
중요도: 기억에 오래 남고, 귀한 여행시간이 험악해질 수 있어 매우 중요함
복습: 여행 가기 전에 한 번씩
코시국 피크에 결혼한 우리는 올여름 2년 늦은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1년 6개월이나 같이 산 남편이니 더 놀랄 것은 없겠지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이런 확신은 현실과 다르다. 두 사람 모두가 낯선 제3의 국가로는 처음 가는 여행이라서 그랬는지, 남편과 나의 여행에 대하는 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다음 여행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오늘은 남편이라는 과목의 여행 영역의 오답노트를 정리해본다.
평소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즉흥'을 담당한다. 즉흥적의 반대말은 계획적이니 남편이 계획적일 거라고 스스로 생각했을까,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남편의 여행 계획이라는 것에 참 많이 놀랐다. 그의 여행 계획은 단 두 가지. 1) 항공권 구매, 2) 첫 3일 호텔 예약이었다. 이게 다냐고 물어보니, 그는 모든 여행을 이렇게 다닌다고 했다. 남편이 꽤 준비성이 철저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익숙한 남편에게 어색한 면이 나와서 당황했다.
여행기록 (22-06-15): 인생도 일종의 실험이니깐 이번엔 이렇게 한번 가보자고 생각했다. 일정을 짜지도 않고 계획 없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이름에 룰루랄라의 룰루가 들어가다니, 그야말로 룰루랄라 하고 도착한 것이다.) 동네 분위기를 또 맞춰줘야지.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동네 순찰하듯 와이키키를 걸었다. 하와이 셔츠를 사 입고 치즈버거에 맥주도 마셨다. 이렇게 이틀을 놀았다.
이틀 째 밤에 자려고 누우니 내일도 똑같은 하루가 될까 봐 마음이 불안해졌다. 내일과 모레 할 것만 정하고 자야겠다 싶어 검색을 시작했다. 한번 시작한 검색은 여러 개의 유튜브 영상으로 이어졌고, 하나를 알게 되면 또 새로운 정보가 파칭코 잭팟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 많은 정보를 두 손으로 받아 분류하고 소화하고 나니 새벽 5시였고, 전체 일정을 정리한 노션 페이지가 완성되었다. 아, 이젠 잘 수 있겠다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에게 아침 커피를 마시며 일정을 브리핑했다. 남편은 매우 놀랐다. 어떻게 휴가에 와서 이렇게 일 하듯 일정을 짜냐고 그것도 잠도 안 자고. 나는 남편이 계획을 짜지 않아서 내가 다 짠 것에 대해 나대로 불만이 있었는데, 그는 반대로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이렇게 안 하면 불안해서 못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나름의 노력:
1. 일단, 계획은 내가 세우자.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가 또 얼마나 다른지 확인했다. 그는 즉흥파 여행이고 나는 계획파 여행자다. 일단 서로가 이렇다는 것을 잘 숙지하자. 남편에게 여행 계획을 기대하지 말자.
나는 일자별로 메인 테마와 주요 일정은 있어야 안정된 마음으로 '지금 여기 이곳'을 즐길 수가 있는 인간이니, 가서 밤새지 않으려면 가기 전에 내가 계획을 세우자.
2. 일정 중 며칠은 계획없음으로 계획하자.
남편이 내 스타일의 여행을 하면 분명 휴가가 끝날 때 즈음에는 지쳐버릴 것이다. 나도 남편 스타일의 계획 없는 여행에 며칠은 동참해봐야겠다. 늘어지게 책도 읽고 길을 헤매보기도 하고 남편 스타일의 여행에 초대해달라고 해야겠다.
이번 여행을 가는 길에 읽었던 <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김민철 작가님의 여행을 보면서 나랑 정말 비슷하다고 자주 생각했다. 그리고 이 문장을 다음 여행가기 전에 다시 읽고 꼭 실천해봐야겠다. 강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꼭 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상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나는 또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어딘가에 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1) 한식을 먹어야 한다. 특히, 여행 3일째부터 간절해진다.
길을 걷다가 남편이 말했다. '지금 뭔가 빠진 것 같아.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 뭔지 모르겠어.'
(몇 시간 후) '빠진 것이 뭔지 생각났어! 김치!'
독일인 남편이 여행지에서 김치를 찾다니, 와 김치의 중독성은 엄청난 것이구나 생각했다. 사실 나도 말은 안 했지만 그날 아침부터 한식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월마트 근처의 식당을 알아두었다. 남편이 말하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김밥과 제육볶음을 먹었다. 앞으로 여행지마다 한국식당을 미리 찾아놓기로 마음먹었다.
2) 저렴한 숙소에 있을 때 마음이 훨씬 편하다.
별 3개 호텔에서 머물다가 신혼여행이니 2일만 플렉스 해보자 하고 와이키키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무려 별 다섯 개 호텔로 옮겼다. 정말 좋긴 좋았다. 그런데, 서로 말은 안 했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 좀 얼었는데? 전혀 편한 얼굴이 아냐. 우리 조금 기가 죽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린 앞으로 별 3개 호텔에서 더 즐거운 휴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힌트를 얻었다.
요즘은 소설을 너무 안 읽는 것 아닌가 싶어 가장 술술 읽히는 서유미 작가님의 소설을 골랐다. <홀딩, 턴> 신혼여행 다녀와서 결혼 5년차 부분의 이혼이야기를 읽자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내가 지금 남편과 관계에 대해 집중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더 공감이 많이 되었다. 결혼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쓰레기통이나 빨래바구니 같은 일상부터 서로의 습관, 싸우고 화해하는 것까지. 그리고 이 책에서 이번 여행의 의미도 찾아냈다.
지나온 어떤 순간, 인상적인 장면을 꺼내 후후 불어 맛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이 베푼 행운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는 언제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우려먹을 수 있는 티백이 필요하다. 청춘이라 명명할 수 있는 장면과 따뜻했던 눈 맞춤, 짜릿했던 키스, 온몸과 마음이 살아 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고스란히 담긴 티백이어야 한다.
아마도 이번 여행으로 둘이 함께 오래도록 우려 마실 수 있는 티백이 하나 생겼겠구나 싶다. 이 티백은 자주 우려 마신다고 닳아 없어지지도 않을 테니 남편과 자주 야무지게 우려 마셔야겠다. 그리고 좀 덜 싸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