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 카드

남편이라는 과목의 오답노트

by 카후나

계절별로 한 번씩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질 때가 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지나면 생각이 잘 안 나지만 감정은 또렷하다.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그런 지옥 같은 시간들이다. 하지만 같이 사는 남편을 계속 피할 수도 없다. 그때마다 꺼내보려고 적어본다. 남편의 효용과 의미를. 그리고 다음 번에 남편이 꼴도 보기 싫지면, 혼자 산책하러 나가서 조용히 열어봐야지.


<내 마음에 상처 주지 않는 습관> #44 '분노의 덫에 빠지지 않는 법' 챕터에서 임상심리학자 김도연 선생님은 분노라는 감정은 평소에 대처 방법을 생각해두지 않으면 자칫 감정에 압도될 수 있다고 하셨다. 남편이 꼴도 보기 싫은 상황에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분노 감정에 압사당하는 느낌이 확실히 든다. 남편에게도 좋은 점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실마리의 역할을 기대하며 정리해본다.


#1. 잘 들어준다.

듣는 능력이 있다. 이 남자. 심지어 나의 괴상한 상상도 이야기 하면 그마저도 들어준다. 가끔 혼자 키득거리면, 왜냐구 물어봐서 이야기할 때가 있다. 오늘은 홍대 책방 무사에 박연준 작가님이 오신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뵈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뒷 자리에서 볼륨 최대의 하품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피곤하신지 하품을 거의 1분에 한 번씩 10분 넘게 하셨다. 갑자기 여기가 작은 극장이고 이 아저씨가 하품 공연을 하고 있다는 상상을 하며 웃고 있었다. 이런 싱거운 이야기도 잘 들어주었다.


그저 들어주는 귀가 있다는 것 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 각자도생 하는 이런 차가운 사회에서 외롭지 않다고 느껴지게 해 준다. 그리고 더 이상한 상상을 자주 해서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야심 같은 것도 생기게 해 준다.


#2. 나의 건강 폴리스police다.

<나의 복숭아>책 안의 최지은 작가님의 <과자 이야기> 편을 읽으며 처음으로 나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서 극 공감하는 독서 경험을 하게되었다.

결혼 후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물론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내 삶이 그 전과 엄청나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건 거실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떳떳하게 과자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최지은 작가님과 정반대다. 결혼 후 가장 달라진 것이 바로 과자나 라면을 떳떳하게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남편은 라면과 과자를 먹는 나를 못 먹을 것을 먹는 사람을 보듯 한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먹냐고 먹을 때마다 질문을 하는데 이럴 땐 딴청 피우는게 최고. 그래서 결혼 후 과자와 라면은 훨씬 덜 먹고 있다. 고마워해야겠지. (문제는 남편이 없을 때마다 먹고 있는데, 그 맛이 너무 꿀맛이라는 것.)


#3. 신기한 것들을 많이 알려준다.

오늘의 신기한 것은 Hägglunds(헤글룬스)사에서 만든 전투용 산악 장갑차였다. 이런 주제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길은 남편 채널밖에 없을 것 같다. 도파민 정키인 나는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 속절없이 이야기 속으로, 영상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고 나면 오늘 남편의 역할은 충분히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https://youtu.be/eTG0z7rjY9g

혹시 산악용 전투탱크가 궁금하신 분이 또 계실가 싶어, 링크를 공유합니다.

#4. 대화에 어린아이를 데려와준다.

독일어와 슬로바키아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나에게 이야기하는 남편은 가끔 재미있는 표현을 해서 즐거울 때가 있다. 꼭 어린이와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엉켰던 마음이 푹 풀릴 때도 있다.


'으, 너 떡 사람이야. 찐덕찐덕거려.': 습도가 많은 날 나에게 떡같이 끈적끈적하게 자꾸 달라붙는다고.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Schluck Wasser in der Kurve(커브를 도는 물살) 같아.': 이건 독일말로 하는데, 물이 모퉁이를 돌아서 오는 장면이 내 모습이랑 겹쳐서 웃긴다. 그럼 한 번 웃고 약간 기운을 낼 수 있다.

'네가 만든 커피는 죽은 사람도 깨울 것 같다.': 내가 가끔 커피를 내려주면 하는 말이다.

장마철에는 저녁 산책 때마다 나가기 싫다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Are you made of sugar?' 그래 내가 설탕으로 만들어 진 것은 아니지 하면서 신발을 신게 된다.


#5. 소프트웨어는 좀 안 맞는데 하드웨어는 잘 맞는다. (아직은)

남편은 종일 오토바이 사진만 본다. 액션 말고는 영화도 안 본다. 심지어 오징어 게임도 지겨워했다. 그 안에 나오는 영화 장치들의 메타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말이 안 통해서 싸웠고, 기생충도 같이 보다가 남편은 거의 졸았다. 이쯤 되니 정말 대화할 거리가 이렇게 없나 싶다.


하지만, 여전히 처음 만난 지 7년 후인 지금도 실감하는 것이 있다. 역시 몸으로 체감하는 것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첫 키스 했을 때 그 느낌은 아니지만 아직도 푸르르 팔의 솜털이 돋는다. 그와 키스할 때.


갑자기 생각나는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의 한 부분.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스트레스 핸들링에 그만큼 도움 되는 것도 잘 없습니다.


#6. 현재를 만족하는 삶으로 초대해준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 밤새 무탈했구나 그럼 된거지’의 마음으로 시작하는 남편은 아침마다 기분이 좋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신 할아버지에게 어릴 때 배웠단다.)


며칠 전에는 미숫가루를 처음 마셔보고는 얼굴이 환해져서는 내가 마셔본 것 중에 가장 맛있다며 한 잔을 더 사 먹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런 말을 참 자주 한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저런 말을 해보는 것이 언제였던가. 항상 이것보다 더 맛있는 게 있었고, 현재는 자주 불평의 대상이다. 같이 살면 남편의 만족하는 마음에 좀 물들 수 있지 않을까?

망원동의 스몰카페 미숫가루 진짜 맛있습니다. 사진은 제가 마신 안티스트레스티밖에 없네요.

이렇게 내가 적었지만, 분명히 남편이 꼴도 보기 싫은 날 이 카드를 열어보면 눈에 안 들어오겠지. 이건 이거고! 하고 분노의 걸음을 걷고 있을 내가 보인다. 그래도 잊지 말자. 남편이 나에게 적응하느라 애먹었지. 내가 적응한 것은 별 것 아닐 거다. 오만하지 말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적응한다고? 오, 그건 참 오만한 생각이야. 내가 태어남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적응하느라 애먹었을 뿐이지.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중 문보영 작가가 수전에게 보낸 편지 중


한 가지 바람은 있다. 이 응급 카드는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좋겠다. 남편이 꼴보기 싫은 날이 자주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분명히 오긴 오겠지. 그러니 계절별로 업데이트를 하며 대비해야겠다.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싸우는 것을 좀 예방해주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바람이 있다.


이렇게 써서 스케줄러 뒷 장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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