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하는 영역

남편이라는 과목의 오답노트

by 카후나

중요도: 극상

복습: 매일 아침


남편은 20년간 독일 정부의 공무원으로 일했다. 나와 결혼하고 자신의 직업과 고향에 깔끔하게 굿바이를 하고 우리는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의 말로는 그동안 일로는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봤고, 독일 말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그는 인생 2막에 대한 설렘을 가지고 서울에 왔다. 재작년 서울에 막 왔을 때만 해도 곧 직장을 구하고 다시 넥타이를 골라 매고 출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실을 몰랐던 것이다. 20년 동안, 그것도 다른 나라 공무원으로 일한 외국인을 고용해줄 곳은 없었다. 바보 같이 이렇게 평범한 사실을 깨닫는 데에 일 년 넘게 걸렸다. 아무도 고용해주지 않으니 방법은 이제 한 가지뿐이다. 우리가 우리를 고용해야 한다. (나도 그 사이 하던 일을 그만두고 사업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요즘 둘이 같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아서 사업화를 해보고 있다. 그리고 거의 매일 다투면서 좋은 팀이 되자는 다짐도 매일 하고 있다.


#1. 틀을 만들기


22-09-25 싸움 기록: 대략 어떤 서비스를 할지 정리가 되었다. 남편에게 2일 정도 해당 서비스에 대해 리서치와 고민을 해보고 만나서 토론을 해보자고 했다. 나는 시장과 관련된 통계현황과 시장의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떤 것들을 하는지 리서치하고 주목해야 할 점들을 정리했다. 반나절이 지났을 때 남편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그런데 남편은 화가 나있었다. 도대체 무슨 고민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를 모르겠다며 본인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씩씩대는 모습을 보며 나는 크게 놀랐고 무엇보다 참 실망스러웠다.


나름의 노력: 남편은 공무원 중에서도 대부분의 시절 군 조직에서 일하거나 혹은 군 출신 보스들과 일을 했다. 뼛속까지 지시를 받고 주어진 과제를 처리하는 일에 익숙하다. 자유가 어색한 스타일이다. 반면에 나는 지시를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생각하는 줄 알고 남편에게 비슷한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창문도 없는 이런 작은 공유 사무실이라 더 자주 싸우는 걸까

이제는 어느 정도 내가 고민을 먼저 하고 틀을 준비해서 남편과 업무 분업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엑셀에 리서치할 내용의 구성요소를 적어서 공유하며 이 업무를 하는 목적과 마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편이 일하기 편한 방법으로 바꾸고 나서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남편이 스스로에 대한 효용감이 무척 상승했다는 것이다. 나는 또 내 생각만 하고 틀을 주면 분명히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남편과 이렇게 일을 하고 나서 남편의 장점이 참 많이 보였다. 무엇보다 나보다 훨씬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한 눈이 더 뛰어나다. 그리고 나와 사고 구조가 완전히 달라서 아이디어가 겹치지 않는다.


역시 방법을 찾으려면 내 기준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실마리라도 보인다는 이 단순한 것을 다시 실감했다.


#2. 내 몫보다 더 하기


22-10-12 싸움 기록: 준비하는 서비스의 홈페이지와 앱 개발을 해야 해야 한다. 아웃소싱 하기로 하고 개발 계약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참고로 나는 계약서 검토를 정말 싫어한다. 하지만 참고 꾸역꾸역 한다.) 일단 계약서는 3번을 읽는다. 첫 번째는 헤드라인과 대충 어떤 내용인지. 혹시 중요 카테고리가 빠지지 않았는지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꼼꼼하게 줄 쳐가며 본다. (내용이 명확하지 않은 곳이나 추가해야 할 곳에 형광펜으로 표시한다.) 세 번째는 형광펜으로 칠한 곳을 펜으로 내용을 명확하게 하여 문장으로 구성하며 다시 읽는다. (이렇게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한 번 더 보고 상대방에게 송부한다.)


이렇게 내가 싫어하는 일이지만 중요한 일이라 극기를 발휘해서 계약서 검토를 하고 있는데, 남편은 앉아서 오토바이 사진을 보고 있는 꼴을 보니 울화통이 치밀었다. 급기야 같은 공간에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근처 카페에 나와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동치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문서를 검토할 리가 있나. 창문을 노려보며 노화를 촉진하는 단맛이 가득한 그린티 프라푸치노만 마시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왔다. 남편은 남편대로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어서 어색한 오후 시간을 보냈다.


나름의 노력: 남편보다 내가 더 빠르고 더 큰 성과를 바란다. 내 인생의 거의 모든 갈등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서 찾을 때 생겼다. 그러니 결론은 분명하다. 내가 일을 훨씬 더 하면 된다. 이렇게 둘이 일을 반씩 하자는 생각을 버리는 데까지 꽤 오래 걸렸다.


https://seths.blog/ 에 이런 촌철살인의 글이 무려 매일 올라온다. 사무실에 나오면 일단 그의 짧은 글을 읽고 일과를 시작한다.

나의 영원한 스승 세스 고든의 블로그를 보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명쾌하게 말한다. 더 좋은 결과를 원한다면 방법은 하나다. 공평하게 나뉜 네 몫보다 더 하면 된다. 왜냐면 다른 사람들이 못한 만큼 네가 채워야 하니까.


독일에서 독일어로 하는 일이었다면 분명히 남편이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너무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사실 곁에서 같은 고민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도 못 하게 큰 힘이 된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소원이 뭐냐고 물어봤다. 그는 되도록 일찍 은퇴하고 태국 바닷가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진짜 나랑 안 맞는 다고 생각했다. 나는 죽는 날까지 일하다가 죽고 싶었으니까. 이 대화가 계기가 되어 한 동안 잭이랑 연락도 안 하고 살았었다. 우리는 원하는 삶의 모양이 너무 다르구나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그랬던 내가 남편에게 영감을 받아 함께 새로운 사업을 해보겠다고 구상하고 있으니. 남편과 김밥 먹어가며 야근을 하고 있으니. 은퇴가 아닌 즐겁게 오랫동안 일하는 인생을 꿈꾸고 있으니. 인생은 정말 확언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박연준 작가님의 산문집 제목처럼 '인생을 이상하게 흐른다'더니 맞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또 어떻게 이상하게 흐를지 모르겠지만, 일단 남편 손 잡고 하루하루 걸어가 보려고 한다.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미지의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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