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글쓰기 25기 10차시 과제
시아빠 밀란(78), 시엄마 야로슬라바(76)와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언어장벽으로 통하는 말은 How are you?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같은 짧은 인사말이 전부다. 철없게도 나는 이런 거리감이 아쉽기보단 반가웠다. 말이 안 통하니 괜한 오해와 갈등을 방지하겠지 싶었다. 그런데 요즘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진 기분이다. 시부모님이 어떻게 사는지 통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뮌헨에 사는 시부모님과 통화한 내용을 남편이 전해줄 때도 가끔은 듣는 척만 할 뿐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
그러다 지난달 글쓰기 수업에서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으며 결혼 5년 만에 처음으로 시부모님이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서른 중반의 두 사람이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국경을 건너는 마음은 어땠을까. 공산주의였던 체코슬로바키아를 벗어나 자유의 땅 독일로 탈출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내면에는 어떤 희망과 두려움이 있었을까? 두 분이 직접 선택한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에 후회는 없을까?
그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마침 남편이 시아빠와 통화 중이었다. 남편 표정이 어두웠다. 전화를 끊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물었다. 시아빠가 십 년 전 수술한 인공심장판막의 품질보증이 올해로 만기 되어, 병원에선 재수술을 권했는데, 밀란은 재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궁금한 것을 미루지 말고 당장 물어보자 싶었다. 나중에 딸이 물을지도 모른다. 우리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는 왜 국적이 독일인데 슬로바키아 사람이라고 하는 거야? 슬로바키아를 탈출했다고? 왜? 거기엔 이야기가 있어?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동기를 가지고 시부모님에게 인터뷰를 의뢰했다. 야로슬라바는 인터뷰를 거절해 시아빠 밀란에게 물을 질문을 추렸다. 남편이 질문지를 쓱 훑어보더니, 이 정도는 자기가 아니까 대답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밀란에게 직접 듣고 싶다고 했다. 이틀 뒤, 슬로바키아어로 된 장문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질문에 체코슬로바키아를 ‘탈출’한 이유라고 썼던데, 나는 ‘탈출’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 그건 ‘떠남’이었어.
70년대 초, 나는 야르카(야로슬라바의 애칭)를 만났어. 같은 사무 단지에서 일하면서 알게 됐고, 73년에 결혼했지. 처음엔 우리 부모님 집 작은방에서 살다가, 나중에 국가에서 배정한 원룸 아파트로 이사했어. 거기서 페트라와 밀로시(남편)가 태어나고, 네 식구가 대략 30 제곱미터 정도되는 작은방에서 살았어. 말 그대로 우리 속에 갇혀 사는 느낌이었어.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어. 모든 건 국가가 정했어.
독재 아래 사는 건 쉽지 않았어. 아이들 물건 하나 구하는 것도 힘들었고, 치약 같은 일상적인 물건조차 쉽게 구할 수 없었어. 오스트리아가 가까워 TV를 틀면 오스트리아 채널이 나왔는데, 그걸 보면서 저 밖엔 전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 와중에 나는 학위가 있으면 생활이 나아질까 싶어,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따려고 공부했어. 야르카는 일하면서 가사와 아이 둘 육아까지 하면서 살았어. 나는 나중에 법률가로 일하게 됐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어. 체제가 사람들의 삶을 꽉 쥐고 있었거든. 좌절이 컸어. 결국 야르카랑 나는 모든 걸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 떠나는 것 말이야.
아이들도 나처럼 이 우리 같은 체제에 갇혀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지도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결국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어. 실패하면 인생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었지. 우리는 감옥에 가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가게 됐을 테니까.
그때부터 비밀리에 떠날 계획을 세웠어. 의심받지 않고 네 가족이 체코슬로바키아 밖으로 나가는 것이 핵심이었어. 그래서 유고슬라비아로 여행 가는 것처럼 속이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독일 국경을 넘는 길을 택했어. 유고슬라비아는 이미 네 가족이 여름휴가로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어서 의심을 안 받을 것 같았거든. 맞아, 그때도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어. 그래봐야 불가리아나,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정도였지. 그곳 역시 공산권이었고, 이른바 ‘철의 장막’ 아래 갇혀 있어 답답했지만, 그래도 바다를 볼 수 있었어.
인맥을 총동원하고 뇌물도 좀 찔러줘서, 결국 10일짜리 유고슬라비아 여행 허가를 받아냈어. 유고슬라비아에서만 유효한 특별 여권이었어. 그 여권을 들고 1984년 6월 3일,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났어.
유고슬라비아에 도착하고 나선 상황이 몹시 좋지 않았어. 야르카가 갑자기 아팠거든(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급성 맹장염이었다), 나는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어. 그래도 야르카가 버텨 줬어. 다행히 거기서 몇 해전 독일로 떠난 친구와 연락이 닿았고, 구체적인 계획이 꾸려졌어. 친구의 아내 우르술라가 독일에서 차를 몰고 와서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까지 우리를 데려다주는 계획이었어.
다음 날 우르술라가 약속대로 도착했어. 나는 그 차 트렁크에 숨고, 아이들은 담요를 머리까지 덮고 뒷좌석 발판에 누워 숨어서 이동했어. 야르카는 조수석에 탔어. 가족이 함께 있는 걸 보면 의심받으니까. 혹시나 짐이 있으면 의혹을 받을까 봐 가방 하나 챙기질 못했어.
국경에 가까워질수록 공포와 긴장이 더 커졌어. 성공할 수 있을까, 두려움뿐이었어. 군 순찰대가 우리 앞을 지나갔을 때가 고비였어. 다행히 차를 세우진 않았어. 아마도 독일 번호판 차에 여성 둘이 탄 것을 보고는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때 우리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어.
우르술라가 국경 근처에서 우리를 내려 주고, 오스트리아 쪽으로 걷고 또 걸었어. 계속 총소리가 들렸어. 군인들이 국경을 지나는 사람들을 향해 발포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총소리를 듣는 건 무서운 일이었어. 페트라는 그때 아홉 살이었는데 정말 용감했어. 울지도 짜증 내지도 않았어. 일곱 살이던 밀로시는 완전히 지쳐서, 결국 내가 안고 걸었어. 우리는 모두 반팔을 입고 있어서 해가 지니까 무척 추웠던 기억이나.
국경석을 지나던 순간, 커다란 긴장이 풀렸어. 첫 관문을 넘은 거였지. 마침내 철의 장막 너머로 나왔구나, 감격스러웠어. 우리는 우르술라와 약속한 장소까지 계속 걸어갔고, 우르술라가 우리를 작은 펜션에 데려다줬어. 거기서 하루를 자고 다음 날은 우르술라가 독일 국경 근처로 데려다줬고, 우리 넷은 독일 국경 쪽으로 걸었어. 그 길은 아이들에게도 쉽지 않았지만, 아픈 야르카에게 특히 너무 힘든 여정이었어. 몇 시간을 걸었나 잘 모르겠는데, 해가 질 때쯤, 우리는 마침내 독일 미텐발트에 도착했어.
경찰서로 가서 난민으로 등록하고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어. 그때 독일 경찰들의 태도는 정말 인간적이었어. 먼저 아이들에게 목이 마르진 않은지, 배고프진 않은지 물었고, 과일 주스랑 물, 과자를 가져다줬어. 우리를 보통 사람처럼 대해줬어.
우리는 1년간 난민 보호소에서 지냈어. 난민들에겐 현금은 지급되진 않았고, 식품 패키지와 기증받은 옷, 아이들용 물품이 제공되었어. 잘 알겠지만, 정상적인 삶을 살려면 돈이 필요해. 나는 밤에 몰래 근처 산장 호텔에서 불법 노동을 했어. 주로 루마니아 의사였던 코르넬과 일을 다녔어. 본국에선 박사님 소리를 듣던 둘이 거기서 온갖 잡일을 다 했어. 매일 새벽 4시에 돌아오곤 했지. 그래도 그 돈으로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살 수 있었어.
마침내 체류 허가가 나왔고, 우리는 자유라는 말을 들었어. 보호소 생활은 그렇게 끝났지. 선교 단체의 도움으로 뮌헨에 작은방을 얻어 이사했어. 아이들은 뮌헨으로 전학하고, 야르카랑 나는 낮에는 체류 허가 의무 사항인 독일어 학교를 다녔어. 수업이 끝나면 나는 저녁 7시에 인쇄소로 출근해서 새벽 5시까지 일했어.
아이들은 부모의 고생을 몰라. 그건 괜찮아. 내 역할이 그거니까, 불평하지 않았어. 고국을 떠나기로 한 선택은 부모의 책임이니까. 2년이 지나 우리는 독일 국적을 받고, 나는 택시 면허를 땄어. 7일 내내 일했지. 원래 내 야망이었던 법률가로의 인생은 뒤로 미뤄야 했어. 독일에서도 시도를 해보긴 했는데, 서로 다른 법체계 때문에 어려움이 컸지. EU 제도가 도입되며, 내 학위가 인정되기도 했지만, 생계를 위해선 택시 일을 먼저 선택해야 했어. 다행히 나중에는 택시 중개회사를 만들어 그나마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만들었지.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어. 결국 내 심장을 그 값으로 요구했다고 생각해.
1991년, 공산주의가 무너졌을 때 나는 큰 환희를 느꼈고, 곧장 고향으로 달려가고 싶었어. 근데 비자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 고향에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다니, 참 아이러니했지. 독일 여권에 슬로바키아 비자를 받아 고향 집에 가봤더니, 내 재산은 국가에 몰수되었고, 우리 집에는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어. 모르는 사람이 내 침대에 누워 있었고, 우리 할머니 그릇에 밥을 먹고 있었어. 법적으로 되찾을 방법도 없었어.
냉전이 끝나고 친구들 중 몇은 슬로바키아 정부의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는데, 한 번은 교육부 차관이 된 친구가 뮌헨까지 찾아와 고맙게도 나와 야르카 일자리까지 도와주겠다고 돌아오라고 했어. 나는 오래 고민하고, 결국 거절했어. 왜냐고? 우리가 떠난 이유는 아이들의 미래 때문이었거든. 또다시 아이들의 인생을 뿌리째 뽑아 불확실한 삶에 던질 수는 없었어. 두 아이는 이미 17, 15살이었고, 독일에 완전히 적응했는데, 그럴 순 없었어. 내 야망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삶, 그건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었어.
아참, 내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도 물어봤지. 내 생각엔 나는 누구보다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어.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났는데, 우리 아버지는 전쟁 중 ‘잘못된 편(나치)’에 있었고, 전쟁이 끝나고 강제노동 수용소에 갇혀 ‘재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어. 대신 나에겐 외할아버지가 있었어.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강아지를 한 마리 사줬어. 나는 할아버지 마당에서 강아지 부보와 함께 자랐어. 할아버지의 좌우명 - 가장 큰 부는 자유다 - 도 그 마당에서 온갖 모험을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내 정체성이 된 것 같아.
내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미쇼라는 말도 기억나. 초등학교에 나는 그 말을 타고 학교에 갔어. 안 믿기지? 나는 그 말에게 온갖 장난을 다 가르쳤는데, 사람들은 자꾸 미쇼는 동물은 사람이 아니라고 잔소리를 했어. 중학교에 갈 때쯤 집단농업화가 시작되고, 공산당이 미쇼도 빼앗아 갔어. 개인 재산은 허용되지 않았거든. 우리 가족의 농지와 숲, 포도밭도 모두 그때 빼앗겼어.
내 마음은 여전히 슬로바키아에 있어. 언젠가 나는 그곳으로 돌아갈 거야. 비스트리차 가족 묘지에. 그곳이 내 마지막 귀향지가 되겠지.
메일을 다 읽고 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왜 나는 한 번도 묻질 않았을까. 작년에 한국에 오셨을 때에라도 물어볼걸. 모른 채로 살아도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언어가 막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밀란이 그렇게 지켜온 아들을 또 한 번 디아스포라로 만든 사람이 나라는 생각이 들며, 죄스러운 마음이 더 깊어졌다. 남편이 잘 다니던 공무원 직업을 그만두고 한국에 오겠다고 했을 때, 평소엔 잔소리 한번 하지 않던 밀란이 몇 번이고 깊이 생각해 보라고 했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밀란이 비스트리차 가족 묘지에 가기 전에 밀란과 야로슬라바, 남편과 딸 모두 함께 슬로바키아 고향 집에 가보고 싶어졌다. 그가 떠나온 고향에 가서 예전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말하고 싶다. 부보와 미쇼와 장난치던 곳은 어디였는지, 택시 운전했을 때 재밌는 에피소드는 없었는지, 야르카와 신혼생활은 어땠는지, 그 고향 집 마당에 앉아 묻고, 밀란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