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1월의 밑줄(2/3)

알바데세스페데스와 이제니를 읽으면서

by 카후나

01월 12일 월요일 기록


일기를 쓰면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우선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대체 왜 그런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건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일기장의 은밀한 존재는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지만, 솔직히 그 덕분에 내 삶이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_ 알바 데 세스페데스, <금지된 일기장>, 32p


오랜만에 딸 재우다 잠들지 않았어요. 밤늦게 혼자 책 읽으니 꿀맛이네요. 게다가 이 책은 또 왜 이렇게 재밌어요?


최근 3개월 은유샘 글쓰기 수업 들으며, 매주 에세이 한 편씩 제출했거든요. 쓸수록 이 문장에 나온 것처럼 활력은 생기는데, 더 행복해지지는 않네요. 못난 나를 더 자주 직면하게 되고, 싫어하는 사람들을 써보니 이해가 돼서 이젠 미워만 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쓰면 또 미운 것도 보여요. 쓰면 쓸수록 인생 복잡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안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 눈앞에 일어나는 일임에도, 모르고 넘어가는 게 생길 것 같아요. 그건 또 싫은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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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월 14일 수요일 기록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 죽었던 나무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알았다. 틀린 맞춤법을 호주머니에서 꺼냈다. 부끄러움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_ 이제니, <밤의 공벌레>,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27쪽


부끄러움을 기록하는 노트를 만들어 볼까? 쓸 거 많을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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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월 15일 목요일 기록


비밀의 서랍 같은 얼굴로, 라일락이 돋아난 얼굴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_ 이제니, <공원의 두이>,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28-29쪽


비밀의 서랍 같은 얼굴 알지. 잘 알고말고. 오늘도 봤으니까. 바로 우리 엄마.

많고 많은 엄마의 비밀 중에 그래도 가장 궁금한 것은

내가 5살 때부터 10살까지 아빠는 어디에 살았는지.

아빠한테 물어보라는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대답을 할까 봐 묻질 못하겠어.

그래도 열고 싶어 그 비밀의 서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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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월 16일 금요일 기록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은

앞으로 간다는 말일까 뒤로 간다는 말일까

_ 이제니, <처음의 들판>,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91-93쪽


기억을 더듬어 와이미용실 집을 떠올리는 중이다. 주민등록 초본에 의하면 내가 스무 살까지 살았던 집은 총 7개인데, 어릴 때 살던 집, 하면 그 집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 집에서 10살부터 16살까지 살았다.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님 머리가 빠마 롯트를 말고 있는 엄마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아 준다. 가방만 대충 벗어놓고 나는 엄마 옆 계산대 의자에 앉아서,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전부 말했다. 재잘재잘. 엄마는 중화제를 꼼꼼히 뿌리면서 내 이야기를 재밌게 들었다. 그때를 떠올리니까 그 화학품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미용실 뒤론 방이 두 개 있었다. 우리 네 식구는 첫 번째 방에서 밥도 먹고, 티비도 보고, 잠도 잤다. 두 번째 방에는 내 책상과 냉장고가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재잘거리는 걸 마치면 냉장고에서 500미리 우유를 한 번에 들이키고 책상에 앉아 숙제를 했다. 그러고 나면 심심해져서 책상 밑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지어내며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스토리는 맨날 똑같았다. 사실 나는 부자에 초능력자인데, 친구들은 모르고 있다는 '숨김' 스토리. 그리고 그 그림을 누가 볼까 부끄러워 박박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저녁에 빠마하던 아줌마들이 다 가면, 엄마는 나한테 고은아 셔터 내려라, 그랬다. 셔터를 내리면 이제 진짜 집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빠진 우리 네 식구만 있는 진짜 집. 10살이 되어서야 할머니랑 살던 동생이 같이 살기 시작했고, 아빠도 어딘가에서 나타나 같이 살기 시작해서 그랬나, 당시 나에게 그 집은 네 가족이 함께 살기 시작한 진짜 집이 돼주었다. 가끔은 늦게까지 머리를 하던 손님들이 있어서 나는 이부자리를 깔고 중문을 반쯤 닫고 엄마가 손님이랑 하는 말을 들으며 잠들었다. 또 가끔은 아침 일찍 오는 손님들 목소리를 들으며 깨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을 생각하다가 와이 미용실 집을 잠시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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