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의 소설과 이제니의 시를 읽으며
01월 08일 목요일 기록
언제고 밀어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닐까.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126-7쪽
01월 07일 수요일 기록
이를테면 뒷 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158-9쪽
01월 09일 금요일 기록
조심하는 마음, 그것을 아주 많이 생각했고
그런 걸 세상에 보태고 싶었습니다.
_ 황정은, <백의 그림자>, 다시 쓰는 후기, 189쪽
01월 11일 일요일 기록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_ 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13쪽
정수 언니랑 헤어지던 날이 생각나. 로테르담으로 대학원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었어. 나는 언니를 안고 고맙다고 길게 말하고 싶었어. 언니 덕에 이 욕 나오게 춥고, 황량한 곳에서 2년이나 버텼다고, 언니가 끓여준 녹두죽 먹고 배탈이 나은 건 언니의 우정을 먹고 나은 거라고, 주절주절 그간 못한 말을 다 하고 싶었어. 근데 언니는 내 가방에 편지를 넣고, 팽 돌아서더니 조금 걸어가다가 돌아서서 고은 잘 가,라고 말했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리곤 어깨를 들썩이며 앞으로 걸어갔어.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어. 언니랑 작별이 좀 더 다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기만 했어.
언니 편지는 비행기에서 열어봤어. 내가 언니 곁에 산 그 2년이 언니에게 전쟁 같은 시기였는데, 내가 꼭 유엔평화유지군처럼 왔다 갔다고 쓰여 있었어.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 나야말로 결혼의 파경과 진로의 불안으로 인생 재난 상황이었거든. 그때 언니가 내 곁에 살아서, 내가 나를 파괴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