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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Dec 09. 2022

그녀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 싸움의 제목은 '시엄마를 미워하지 않기'. 인류 역사 6,000년 동안의 승패 기록은 철저히 나에게 불리하지만, 그래도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 그런데, 상대가 너무 강적이다.


일단, 그녀의 말은 80%가 불평이다. 친자매들도 풀 한 포기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메마른 불평의 땅을 견디지  못하고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났다. 그녀의 딸도 엄마가 불평을 시작하면 문장 허리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거나, 통화 종료 버튼을 가차 없이 누른다. 불평의 내용은 다채롭다. 이웃이 너무 시끄럽고, 윗집 가족이 토요일 아침부터 바비큐를 해서 냄새가 나고, 남편이 해주는 음식이 맛이 없고(시아빠가 모든 요리를 하십니다.), 글루텐을 소화하지 못하는데 남편이 밀가루로 요리를 했다고 하고(시아빠는 가끔 글루틴 프리 재료라고 하고 요리를 하시는데, 그때마다 시엄마는 소화가 잘되고 맛있다고 하셨다. 역시 꾀병이었다.), 남편이 자신의 인생을 평생에 걸쳐 망쳤으며, 온몸이 아프다는 것이다. 남들은 자주해야 1년에 한 번 하는 종합검진도 시엄마는 3개월에 한 번씩 하신다. 작년에는 갑자기 아프시다고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에 갔는데 아무 문제가 없고 건강하시다고 했다.


시엄마가 독일어와 슬로바키아어 밖에 하실 수 없어 정말 다행이다.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었다면 무척 살벌한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남편은 효자, 불효자로 굳이 나누면 효자 쪽에 속하는 아들로 부모님께 거의 매일 전화를 한다.(시부모님은 독일에 사십니다.) 그리고 매일 엄마와 싸운다. 남편이 나에게 오늘은 어쩌다 언성이 높아졌는지를 토로하면서 시엄마에 대해 알게 되었다. 대체로 시엄마가 5-10분 동안 자비 없는 불평의 폭탄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받고 있던 남편이 녹다운돼서 몇 마디 하면, 그것이 다음 전쟁을 일으키는 패턴이었다.

(가운데)젊은 시엄마가 남편을 안고 있다. 명랑하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던데.(그건 모르겠고, 머리숱이 진짜 많다.)

젊었을 때는 꽤 명랑하던 양반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이 돼버린 것일까 궁금했다. 혹시 어디가 진짜 편찮으신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별 생각을 다 하던 중 답이 될 만한 것을 또 책에서 찾았다. (제가 이러니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그것도 전혀 상관없는 분야인 한국사회비평 분야의 책이었다. ‘시대의 강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고민들’이란 부재를 달고 한겨레출판사에서 발행한 이 책은 정지우 작가의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아래 부분을 읽자마자 시엄마가 떠올랐다. 머리를 아주 세차게 갈겨 맞은 기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소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외로워서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사람이 가진 어떤 이상함, 불협화음, 부적응이나 어색함은 많은 경우 외로움에서 나온다.
외로운 사람은 어쩌다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생겼을 때 지나칠 정도로 말을 많이 한다. (중략) 이 사람 요즘 외로웠나 보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렇게 하는구나 생각하고 만다.  
외로운 사람은 때론 목소리가 커지고 쉽게 욕을 하고 흥분을 잘 가라앉히지 못하기도 한다. 심신이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있어서 꽤나 적절한 감정을 골고루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타인의 외로움에 대해서만큼은 더 관대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외롭게 큰 아이는 정서 발달은 물론 지능 발달도 느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외로운 노인은 치매에 더 쉽게 걸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극도로 외로울 때 마약이나 도박에 빠지거나 심지어 목숨을 끊는 경우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적어도 누군가의 외로움에 대해서만큼은 최후의 연민을 지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시부모님은 30대 초반에 그동안의 모든 인연과 이별하고 이민 와서 고독한 고립의 삶을 사셨다. 시엄마는 지금도 같은 도시에 가끔 수다를 떨거나 산책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 보고 싶은 가족과 친구들은 멀진 않지만 가깝지도 않은 슬로바키아에 있다. 코로나 시국을 건너며 같은 도시에 사는 이웃들과도 멀어지고 모르는 사람과 모르는 세계에 대한 경계심도 더 커졌다.


외로우시구나. 이 책을 읽다가 깨달아버렸다. 아...


시엄마는 태어나보니 공산주의 국가의 인민이었다. 물자가 여유롭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어른이 되어서 그런지 지금도 지독하게 물자를 아끼신다. (비닐봉지도 버리지 않고 다 모으십니다.) 당연히 스마트폰도 필요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께 스마트폰 한 대 놔드려야겠어요'를 제안한 것은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던 나였다. 아무래도 5G까지 사용하는 이 현대 시대에 아미쉬(종교적 이유로 전자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기독교파)도 아니고 스마트폰이 없는 것은 너무 비문명적인 것 같고, 슬로바키아에 사는 친구나 친척들과 교류를 좀 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스마트폰이 불러온 파급효과는 상상을 뛰어넘었다.


스마트폰이 생기자, 시엄마는 슬로바키아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단톡방에 초대되었다. 사촌들, 자매들, 조카들이 있는 단톡방은 활기찼다. 오늘 요리한 음식 사진, 산책 사진, 강아지 사진, 손주들 사진을 공유하고 시엄마가 편한 슬로바키아 말로 수다가 이어졌다. 그러자 불평의 아이콘이던 그녀가, 요리라고는 지난 10년 동안 거의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그녀가 달라졌다. 2주 전에는 큰 솥에 야채수프를 끓이시더니(단톡방에 올리고), 지난주에는 태어나 처음 쿠키를 굽고(단톡방에 올리고), 멀리 산책을 가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평의 지분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자주 웃으신다. 세상에, 농담도 하신다.


이 상황에서 누구보다 시 아빠가 가장 큰 수혜자이지만, 남편과 나도 참으로 덕을 보고 있다. 정지우 작가님은 아실까 작가님의 통찰의 글이 두 가족을 살렸다는 것을.

(아마도 단톡방에 올리시려고) 49년생 시엄마가 태어나 처음 만든 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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