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리듬 영역

남편이라는 과목 오답노트

by 카후나

중요도: 대단히 중요, 특히 #2번 안 지키면 하루가 빡빡해진다.

복습: 일주일 회고 시마다 생각해보자.


#1. 너와 나의 아침


대화 기록(21-03-10): 평소처럼 6:30분 즈음 일어나서 식탁에 앉아 조용한 조명을 켜고 스케줄러에 지난 일주일 회고를 하고 어제 일기를 쓰고 있었다.


잭: (노래를 부르며 다가온다.)

은: (왜 아침에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거지? 이상하다.)

잭: 잘 잤어? 뭐 쓰는 거야? 어제 먹었던 고기 진짜 맛있다는 것 그건 꼭 써야 해. 진짜 맛있었잖아. 그리고 참, 서비스도 좋았잖아? 까칠한 너네 아빠도 좋아하셨잖아.

은: (아.. 아침에 사람이 저렇게 오랫동안 말을 빠르게 할 수 있는 거구나.)

잭: 왜 잘 못 잤어? 왜 그래?

은: 할 말이 있어. 좀 옆에 앉아봐.

잭: 왜? 어제 뭐 문제 있었던 거야?

은: 내가 뭘 좀 부탁하려고. 나는 말이야, 에스프레소 머신처럼 아침에 전원을 켜면 예열을 좀 해야 해.

잭: (당황한 기색이더니) 알았어. 몰랐어. 근데 네가 무슨 말하는지 정확히 알아. 예전에 군대서 일어나자마자 정말 시끄러웠던 사람이랑 같이 살았는데 아침에 정말 힘들었었어.


남편은 일어나자마자 에너지가 거의 최고치라 (밤새 안녕한 것 자체가 기쁨이란다.) 아침부터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춤도 추고 유머를 마구 던진다. 나는 아직 이것을 받아낼 기력이 없다. 아침에는 모든 감각이 조금 더 예민해지는 느낌이다. 일어나자마자 내 기분은 평생 0부터 10까지 중 5를 넘는 일이 거의 없다.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수영을 하고 나면 7-8로 올라온다. 남편은 평생 5 이하로 떨어지는 일이 보통 없고 대략 7-8이란다.


나름의 노력: 조금 꾀를 내서 다른 방 한쪽 구석에 책상을 마련했다. 지친 동물도 혼자 코너에 가서 쉬잖아? 하며 여기서 아침 에너지를 챙기면 되겠구나 싶었다. 이제는 아침에 노래 부르는 남편을 식탁에서 만나는 일이 없으니 일기도 맘껏 쓰고 하니 살 것 같다. 저렴하지만 생기를 주는 초록색 조명까지 곁에 두니 아침마다 여기로 오고 싶은 느낌까지 들었다.

책상은 왜 언제나 어지러울까

그 아침 대화 이후로 남편이 아침에 조금 신경을 써준다. 그런데 방 밖에서 아침에 행복한 얼굴로 손만 흔들거나, (구텐 탁이라고.) 방 밖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딘가 짠하다.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아침부터 이렇게 까칠할 일인가 싶어 미안해진다. 하지만 나는 아침부터 춤을 출 수는 없는 일이라 그대로 책상에 앉아서 하던 것을 마저 한다.


마음은 항상 내가 좀 일찍 일어나서 기운을 차리고 책도 한 100페이지 읽고, 그가 일어날 즈음엔 웃으며 "모닝커피 마시러 나가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현실은 "오늘도 지각이다."를 외치며 아침부터 우당 탕탕이다.


#2. 혼자만의 시간


작년 회고 중(21-12-30): 약 12개월 동안 같이 살면서 우리를 지키려면 하루 자유시간 중 1-2시간 정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체 둘 다 상당히 독립적인 성향이고 사실 40살이 넘도록 혼자 산 관성이 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가 ‘얼론 타임’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은 누구든 필요하면 버튼을 누르 듯 상대에게 이야기하고 서로가 존중해준다. 길지도 않다. 커피 한 잔 마실 시간 정도면 된다. 서로가 버겁거나 싫어서가 아니다. 친구들은 이런 우리를 좀 이상하게 볼 때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이 시간이 꼭 필요하다. 우리를 만들어주는 엔진에 낀 자잘한 돌멩이와 먼지를 제거해주는 것 같은 시간이다.


나는 혼자 책도 보고, 티브이도 보고 청소와 정리를 한다. 나에게는 청소와 정리가 나름의 명상이고 힐링이다. <프렌즈>의 모니카처럼 나도 불안할 때 스스로 청소를 처방해준다. 청소와 정리를 자주 하면 의외로 불안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 항상 뭔가 들고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내 모습이다. 사실 남편이 엄청 놀리는 부분인데, 왜 집에서 편하게 쉬지 못하냐는 것이다. 나도 잘 모르겠다. 집에서는 일 할 때보다 더 바쁜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도 그러던데.)


혼자 있을 때 남편은 대부분 나가서 혼자 천천히 걷고 잠시 카페에 앉아있다가 뉴스와 오토바이 사진을 본다고 한다.

<프렌즈> 시즌 10, 에피소드 10 중 모니카가 큰 진공청소기를 작은 청소기로 청소하고 있다. 그녀의 해피타임.

이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서로가 조금 그리워진다. 같이 커피 마실까, 오늘 넷플릭스 영화 하나 같이 볼까 이런 마음이 저절로 올라온다. 아주 조금의 이런 마이크로 그리움이 땔감이 되어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강하게 해주는 것 같다.


#3. 신혼의 리듬


깨달음의 기록(21-11-21): 지난 8월부터 여러 가지 슬픈 일들이 겹쳤다. 힘이 빠지고 채우기 전에 또 빠지는 일이 생겨서 나는 우울해졌고 남편은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내 우울과 그의 불안을 나눠 먹었는 시간이었다. 또 나의 마음을 어디 이야기도 못하고 빈 노트에 내 마음을 손이 뭉개져라 쓰는 시기였다.


그러던 11월에 이 책을 만났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읽었다. <긴 여행의 도중>이라는 제목의 이 아름다운 책은 내 아버지 또래의 한 동물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 님의 알래스카 생활기다. 서울의 뜨신 방구석에서 반팔 티셔츠를 입고 책을 읽고 있지만, 카리부 사슴 떼가 지나가는 계곡을 지금 보고 있는 것 같은 현실감과 그 차갑지만 생명력 넘치는 땅과 내가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가슴에 넣어주는 신기한 책이다. 여기서 나오는 한 문장을 읽고 새삼스럽게 내 우울한 마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작가는 셀리아 (77세), 지니(78세)와 소중한 우정을 나누었는데, 만날 때마다 카리부의 계절 이동이나 늑대를 만날 수 있는 멋진 강을 찾으면 바로 떠나자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더 늦기 전에 약속을 반드시 실현시키자며 신제크 강으로 떠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문득 '추억'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사람의 일생에는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 때가 있는 듯했다. 셀리아와 지니는 그 인생의 '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신혼의 시절을 뭘로 기억할까란 생각에 이르렀다. 우울한 날들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추억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망가뜨리지 말고 이제라도 정신 차리자는 느낌이었다.


나름의 노력: 여행을 자주 가거나 외식을 자주 한다고 추억이 쌓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추억은 뭔가 오래 기억에 남지 않는 것 같았다. 남편이 좋아하는 것에 일단 관심을 좀 가지고 대화를 하면서 무슨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왕년에 경영컨설팅녀답게 일단 종이에 2x2 4분면을 만들었다. 여기에 둘 다 같이 좋아하는 것, 나만 좋아하는 것, 잭만 좋아하는 것, 둘 다 싫어하는 것의 구역에 생각 나는 대로 적어봤다. 생각보다 내가 잘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2X2를 그리고 각 칸을 채우다 보면 마음속 질문의 답이 조금씩 떠오른다.

남편을 더 알아가려면 같이하는 프로젝트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렇게 최근에 시작한 것이 둘이 함께 ‘일주일 기록하기’다. 망원동 기록 상점에서 일주일 컬러링 키트를 사서 함께 해보고 있다. 아직 2주밖에 하지 않았지만 애들처럼 공책에 색칠을 하고 있으니 은근히 귀여운 추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우리가 지나온 이 한 주 한 주의 색깔을 다시 꺼내 보면서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기대된다.

예상외 소득은 내 수면 시간이 정말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잘 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스스로를 보는 것은 어렵다.

거의 책 전체에 밑줄을 그은 책이 있다. 한수희 작가님의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이다. 작가님들은 어쩜 그간 내가 생각했던 것들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적확한 표현으로 집어주시는지 경외심이 든다.

결혼을 하면 낯선 사람들과 가족이 되어서 평생 이해할 가치도 없다고 믿었던 것들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억지라도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오만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기분에 맞지 않는 것들을 가차 없이 잘라 내면서 점점 고립될지도 모른다.

사람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부딪치고 깎이면서 진짜 사람이 되어 간다.

좋아하는 것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 언제나 가장 좋을 때 "그럼 여기까지"하며 쿨하게 자리를 뜨는 걸로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생각은 그렇다.
한수희 작가님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책 만드는 희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오만한 사람으로 고립되어 살면 어쪄지의 두려움이 커서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 불안감을 줄이고 싶었는지 늘리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사주를 보러 다녀왔는데 나는 사주에도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란다. 하지만 나도 나를 벗어나고 싶다. 달항아리처럼 포근하게 다른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고, 둥글게 손잡고 아끼는 사람들과 가슴 깊은 관심을 주고받으며 살고 싶다.


나와 정말 다른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이 결혼 생활에서 노력하면 원래 자리를 맴도는 것이 아닌 조금 나은 방향으로 나선으로 걷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언젠가 미래에는 나도 남편과 노래 부르며 춤추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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