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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Jan 31. 2023

지난주와 이번 주의 밑줄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01월 16일 월요일

스마트폰을 손에 쥔 자는 손안에 세상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다. 세상이 스마트폰만 한 크기로 작아진 것이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박연준 185p


정말 작아진 것일까? 커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네덜란드에 사는 친구가 뭐 먹고 어떻게 사는지 동네친구보다 더 세세히 알게 되고, 육아에 절여져 있는 친구라 만나지 못하지만 안부는 인스타 스토리로 대충 어떻게 사는지 알고 있다. 관심은 있는데 선뜻하지 못하던 취미(예를들면: 새 관찰)도 침대에 누워서 하고 있다. (유튜브 새덕후 채널 팬입니다.) 이 정도면 세상이 커진 것 아닌가?


시인의 말에 반박하려고 노력해봤지만, 사실 소용없었다. 스마트폰 안에 존재하는 간접적인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곁에 있는 세상이 작아지는 경험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가끔 식사를 할 때도 표정을 읽고 대화를 하기 보다는 휴대폰을 보며 대답할 때가 많다. 남편과도 침대에 누워서 서로 스마트폰을 보다가 잠들 게 되는 것이 요즘이었으니까. 게다가 요 며칠 추워서 산책도 안 갔더니 유튜브를 지나치게 많이 보고 있다. 10-20분짜리 짧은 영상을 한 두 시간은 우숩게 보고 있다. 시인의 이 문장을 만나기 전까지도 나는 꽤 스마트하게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이용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 스마트폰에 꽤 중독된 것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집중하는 시간이 비참하게 적어졌다는 것. 몇 년 전 일기를 쓰다가 깨달은 사실인데 내가 하루에 만족하는 정도는 집중한 시간에 거의 정확히 비례하는 것이었다. 그 시간은 나에게 살아있는 시간이랄까? 운동을 하든, 책을 읽든, 친구와 대화를 하든, 일을 하든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집중하며 ‘살아있으면’ 좋은 하루다. 그런데 짧은 영상과 단편적 내용을 자주 보니 나의 집중의 인대가 끊어지고 있는 중인 것 같은 느낌이다. 시인처럼 폴더폰으로 바꿀 용기는 없지만, 적어도 집에 오면 스마트폰을 멀리 두어야겠다. 집에서만은 ‘살아있고’ 싶다.


01월 17일 화요일

못하는 놈이 머릿속에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라고 되뇌어봤자 그건  아무런 도움이 안 돼. 중요한 건, 할 수 있다는 ’경험‘을  얻는 거야.
<가능한 불가능> 신은혜

새해가 찾아오면 아직도 들뜬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또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은 마법 같은 느낌이 설렌다. 그렇게 2, 3주가 지나 설선물 세트가 마트에 보일 때가 되면, 들뜬 기분은 가라앉고 야심 찬 올해의 다짐들도 현실감을 찾아 눈치껏 적당한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면서 가끔은 지나치게 현실적이 돼버리는데, 그 마음을 조금만 공중으로 띄우고 싶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능한 불가능> 매년 딱 1가지의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한 작가의 9년간의 이야기이다. 운전을 시작으로 수영, 에세이집 내기, 하와이에서 살아보기 같이 관성대로만 산다면 가볍게 할 수 없을 것들, 그녀가 두려워한 것에 대한 도전기다.


내가 나를 믿어줘야 도전을 할 동력이 생기는데, 할 수 있다는 마음만 가지고는 몇 미터도 가기가 어렵다. 오히려 ‘이게 될까?’,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한번 해보지 뭐.’가 필요하다. 일단 저질러보지 않으면 경험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경험을 타고 다음 경험으로 날아갈 수밖에 없어서 아주 작은 경험이라도 얻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책에서 나온 이야기처럼 우주복 헬멧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일단 선글라스를 써보는 것이 필요하다. 운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작가가 운전면허 시험 문제집을 사는 것처럼. 도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아주 작은 경험을 해보자 다짐한다. 나를 잘 달래서 내가 웃으며 쉽게 할 수 있는 범위로 소분해서 한 발씩만 딛게 하고 싶은 2023년이다.


01월 18일 수요일

소설을 읽다가 그 맥락과 상관도 없는데 가슴을 베는 것 같은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단지 나는 소설 속으로 하나, 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이 문장을 읽고 수많은 생각이 겹쳐서 잠깐 책을 덮고 이 문장을 썼다. 역시 재능의 영역에서는,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는 기초적인 생각을 아직도 다시 배우고 또다시 배운다. 내가 친해지고 싶은 글쓰기도, 엄마처럼 시원하게 끓여내고 싶은 콩나물 김치찌개도, 더 물 흐르듯 하고 싶은 태권도 품새도, 일에 대한 더 전복적인 생각도 질로는 아직은 승부가 안나는 재능이라서, 지치지 않고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을 소설을 읽다가 별안간 생각한 날이었다.


01월 19일 목요일

절제하다 사라져 버린 능력.
하지 않으면 지워지는 언어.
아끼면 사랑은 불능이 된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박연준 164p

아끼다 불능이 된 것 사랑이 아니라도 너무 많다. 절제하는 것이 나를 불능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봤다. 자주 절제해서 말하고, 절제해서 희망하고, 절제해서 좋다고 하고, 절제해서 수영하고, 가끔 일기도 절제해서 쓴다. 내가 나를 불능으로 만드는 절제가 있는지 - 아니 - 많은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막 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을 가감없이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절제없이 꿈 꾸고, 절제하지 않고 가고 싶은 여행지를 희망하다가 결국 그곳에 가서 마시고 싶은 맥주를 주문하고 아낌없는 햇살을 받으며 절제란 없는 일기를 쓰고 싶다.


01월 20일 금요일

조르바는 행복을 편애하는 자가 아니라, 행복이 편애하는 자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박연준 248p

이 문장을 읽고 여러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바로 떠오른 이름은 리추얼 메이트 미리님. 방전되었을 때 충전해 주는 것이 도처에 가득하다는 말을 듣고 정말 행복금수저라고 생각했다. 남편도 떠올랐다. 남미에서 자란 것도 아닌데 특유의 단순함을 가지고 종일 자기 농담에 웃으며 하루를 보낸다.


행복이 나를 편애하지 않는 것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맙게도 편애해 주는 것이 한 가지는 있으니, 잠이다. 이코노미석에서 6-7시간은 충분히 잘 수 있고, 시차 적응도 맥주 한 잔 정도면 극복이 가능하다. 행복이 편애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당신을 편애하는 하나가 있을 것이다. 남동생은 주차장이 편애한다. 그가 주차장에 진입하면 신기하게 갑자기 차들이 자리를 만들어준다. 친구 S는 날씨가 편애한다. 내 올케는 예약사이트가 편애한다. 그녀가 로그인하면 없던 자리가 생긴다.


불안하고 뻑뻑한 일상 속에서 어떤 것이 나를 편애해 준다는 생각이 드는 일은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 안길 때처럼 안정감이 느껴지는 귀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01월 23일 월요일

그 후로 며칠 동안 유이치의 말들이 불쑥불쑥 머리에 떠올랐다. 안개에게 항구와 도시를 충분히 바라볼 시간을 줘야 한다는 말. 레드우드는 키가 커서 안개를 먹고 자란다는 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12p


제목을 보고 안 사고, 안 읽을 수가 없는 소설을 읽고 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천천히 발목부터 무릎, 허리, 가슴까지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조금씩 머리 들고 개구리 수영을 하는 기분으로 소설의 진도를 내고 있다. 초반이 끝나가고 있는데, 중반 이후에는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잠영으로 숨 참고 봐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소설 안에서 주인공이 유이치의 저 말이 불쑥불쑥 떠올랐다고 했는데, 나도 소설을 읽는 동안 저 장면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키가 너무 커서 뿌리에서 물을 끌어다 쓰기 어려운 레드우드 나무가 안개가 자욱한 날씨에 가만히 물을 마시는 장면. 어떤 장면은 소설의 중심 이야기보다 더 오래 기억되는 것 같다. 이야기는 끝나도 오랫동안 심상이 마음에 오래 남아 내가 예전에 가본 장소같이 기억된다.


01월 24일 화요일


일주일 전에 유튜브와 인스타를 지웠다. 안 입는 옷들 정리하고 나면 그런 옷이 있었나 기억도 안나는 것처럼, 유튜브와 인스타가 전연 궁금하지 않아 신기했다. 하루에 서너 시간은 눈을 맞추고 친하게 지냈던 사이인데 이렇게 하찮게 돼버리다니. 그 공란을 소설로 채웠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라는 문장을 뒷 표지에서 읽고 연인들의 이야기라고 여기고 샀던 책이다. 하지만 역시 문학의 힘은 전복에서 나오나 보다. 내 예상은 철저하게 틀렸고, 이야기는 내 생각과는 다른 항구로만 전진해서 이야기 배에서 계속 내리고 싶었다. 그런데 문장이 어찌나 근사한지, 예상이 안 되는 이야기는 또 왜 이렇게 끌고 가는 힘이 좋은지, 그야말로 ’ 숨 참고 love dive‘ 해버렸다. (아이브 팬입니다.) 다 읽고나서는 왜 장편인데 단편처럼 끝나는 느낌인지 폴란드 예술영화를 본 것처럼 체한 느낌이 들었는데, 책의 마지막 문장이 손을 따주었다.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287p


어떤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어릴 때는 이걸 잘 몰랐다. 말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참 오랫동안 살았다. 며칠 전에는 친구가 너무나 태연하게 묻지 말아 줬으면 하는 것을 물었다. 아 친구는 아직 모르는구나. 말하지 않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아직도 천진한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해맑은 나라에 사는 친구가 부러워지기도 했다. 소설을 덮으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과 누군가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01월 26일 목요일

내 몸이 수평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감사해한 적이 없었다. 어쩜 그렇게 단잠을 잘 수 있었는지 지금도 믿을 수가 없다.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70p

딱 이 생각을 한 적이 있다. 19년 봄 안나푸르나 트랙킹 중이었는데, 그날은 점심 먹고 나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5시간 넘게 걷고 체온이 떨어져 몸이 덜덜 떨리는 상태로 산장에 도착해서 방 배정을 받았다. 침대를 보고 이건 침대가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는데, 벽돌 위에 판자만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그런 침대 3개가 팔만 뻗으면 있는 곳에 나란히 붙어 있었으니 정말 암담했다. 거기서 잘 생각을 하니 내 인생 전체를 비관하는 이상한 마음에도 도착했는데, 왜 편안한 내 침대 놔두고 네팔까지 와서 돈 주고 이 고생을 하고 있나, 나는 좀 모자란 사람이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몇 시간 후에 그 침대라고 부를 수 없는 판자 떼기에 침낭을 깔고 내 몸을 수평으로 만들고 나니 갑자기 너무 감사한 마음이 올라왔다. 이렇게 누울 수 있다니, 빗속에서 거머리에게 물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다니, 아직도 자몽맛 젤리가 두 팩이나 남아있다니. 모든 게 감사한 것이다. 수평자세를 한 즉시. 그리고 저녁 8시부터 아침 6시까지 정말 믿을 수 없는 단잠을 잤다. (이 날 이후로 저는 어디서든 잘 수 있다는 자심감까지 얻게 되었네요.)


요즘도 자주 침대에 누울 때마다 이 날의 수평자세를 생각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침대에 누워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밖으로는 쏴아 빗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지금 누워있는 내 침대에게 감사하게 되고, 오늘 놓치고 감사하지 못한 것은 없나 하나씩 생각해 보게 된다.


01월 27일 금요일

나는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의 백미가 상실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모든 경험이 바로 자신을 철저히 일상생활의 편리함에서 격리시키는 것, 그래서 가공 처리된 치즈나 사탕 한 봉지에 감읍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89p

내 버르장머리는 고치는 최고의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맨날 불평하고, 입 쭉 내밀고 화내고, 짜증 내는 내가 전화도 안 터지고, 샤워도 못하는 네팔 오지에 15일 정도 다녀오면, 신호등에게도 고맙다고 인사하게 된다. 언제 다시 긴 트랙킹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 나 사는 것을 보면 대자연에게 뺨 몇 대 대차게 맞고 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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