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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Jan 15. 2023

이번 주의 밑줄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밑줄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슬픔의 방문>> 장일호

이번 주는 이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차길처럼 아니면 징검다리처럼 밑줄을 따라 평일을 살고 일요일에 도착했다. 월요일부터 매일 읽은 책에서 가장 즐겁게 읽은 문장을 적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생각으로 간단하게 문장일기를 쓰고 있다. 글쓰기와 친해지고 싶은데 안면을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라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는데, 자연스러운 방법을 찾은 것 같아서 기쁘다.


23-01-09 월요일 문장일기


책이 읽어지지 않는 날들이 있다. 어서 읽고 그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데, 마음이 계속 현실에 있으려고 한다. 산책을 가자고 계속 줄을 당겨도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는 고집 센 시바견처럼 내 마음이 오늘 그랬다. 도저히 글자의 세계로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날에도 읽어지는 책을 만나면 참 특별하게 느껴진다. 뭐랄까, 배탈 나서 아무것도 못 먹는데 유일하게 소화할 수 있는 음식을 만난 느낌이랄까. 나에게 이런 흰 죽 같은 글을 써주시는 작가님을 하나 더 찾았다. 김연수 작가님. 원래 마스다 미리, 한수희 작가님 이렇게 두 분이었는데, 리스트가 길어지고 있어서 뿌듯하다. 나를 사용하는 법을 한 가지는 더 알게 되었으니까. 앞으로 책이 안 읽어지는 날들이 자주 찾아올 텐데, 그 퍽퍽한 날들을 부드럽게 해 줄 작가님들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 든든해진다.


최상의 독서란 내가 막 쓰려고 했던 그 글을 읽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시절일기>> 김연수


김연수 작가님의 이 문장을 보고 왜 그 세 분의 작가님의 글은 퍽퍽한 날에도 읽어지는지 새삼 깨달았다. 내가 막 하려고 하는 말들을 만날 수 있는 책이라서 그런 것이었다. 내일은 책이 더 잘 읽어졌으면 좋겠지만 뭐 그렇지 않아도 이제 두렵지 않다. 나도 몰랐던 내 말을 해줄 책들이 책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23-01-10 화요일 문장일기

경험이란 우리의 실수가 쌓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절일기>> 김연수

실수의 한자를 찾아보니 흥미롭다. 失手 손을 놓치는 것, 손에서 놓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뭐든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그만큼 실수는 적었다. 하지만 또 그만큼 경험한 것도 적었다는 것을 함께 알게 되었다. 경험은 아주 많이 하고, 실수는 무조건 적게 하고 싶은 내 마음은 그야말로 놀부 심보였다. 환상 속에서 살고 있었다.


1월이니 다짐하기에 좋은 시절이라는 핑계를 삼아, 내일부터 실수의 하루하루를 살자고 다짐해 본다. 꽉 쥔 주먹이 펴지려나 모르겠지만, 주먹 쥔 채 고정되기 전에 자주 풀어줘야겠다. 실수를 쌓으면 경험이 된다는 것. 어릴 때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고있었는데 벌써 잊은 것일까? 이렇게 빤히 아는 것도 다시 배워야 하는 내가 참 아쉽다.


23-01-11 수요일 문장일기

책은 내면의 얼음을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예술은 익숙한 현실을 찢는 가위니까.
<<시절일기>> 김연수

작년에는 도끼로(책으로) 내면의 얼음을 깨려고 노력했다. 성공적으로 깨진 못했지만, 좋은 도끼 몇 자루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올해는 그간 잘 챙기지 못했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예술도 챙겨보자고 작게 다짐을 했더니 2주도 되지 않아서 영화 두 편과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익숙한 현실을 찢어 주는 가위라는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파괴적이진 않았지만, 일상적 생각의 범주에 금을 냈고 그 틈으로 다른 세계를 보는 내 시선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시선도 해가 갈수록 고정되어서 예술적 경험이나 비일상적 순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는 것도 중년의 삶의 일부인가 싶었다. 일상적 나로만 고정 돼버리면, 나중에 뻔한 소리만 하는 할머니가 될까 봐 너무 두려우니까 도끼와(책과) 가위를(예술을) 곁에 가깝게 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23-01-12 목요일 문장일기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중 첫번째 시

한 달에 한 편의 시를 외우고 싶다. 1월에는 이 시가 좋겠다. 짧기도 하고 키우고 싶은 인내의 근육과도 연결되어 있으니까. 연말에 시간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책 <<4000주>>(올리버 버크먼) 를 읽고 시간관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같은 지혜만 얻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 책의 한 부분이 생각났다.


예술에 요구되는 여유 있는 템포를 가르치고 싶은 한 교수님의 수업방법이다.

지역 박물관에서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하나 선택해서 3시간 동안 감상하는 것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이메일이나 소셜미디어를 확인해서도 안 되고, 스타벅스에 잠시 다녀오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녀는 예술에 요구되는 여유 있는 속도로 학생들의 삶과 작업 템포를 늦추지 못한다면 교수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읽자마자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마음속으로 내가 3시간 동안 작품 하나를 봐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 생각도 해봤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3시간은 정말 길다. 30분 정도는 도전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가끔 이해가 전혀 안 되는 난해한 시를 입으로 읽고 나면, 그 목소리를 들은 나만 이해하는 구절이 생긴다는 것이 떠올랐다. 시간을 두고 하나씩 템포를 느리게 보면 보이는 세상이 있는 것 같다. 두 번 세 번 읽었을 때와 100번째 읽었을 때의 시의 얼굴이 달라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3시간 동안 한 작품을 보는 그 훈련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정말 할지는 모르겠다. 이 훈련을 하면 ’그 흰빛의 마라톤을 유심히 지켜보면’, 나는 없어지고 예술가의 눈이 나온다고 했는데..... 욕심이 좀 나는데... 오늘 이 시를 읽으면서 이런 욕심을 부려봤다.


23-01-13 금요일 문장일기


오늘은 책을 잘 골라서 하루가 빛났다. 가끔은 날씨와 책이 잘 어울릴 때 바닷속으로 잠수하는 것처럼 책으로 들어가는 기분인데, 운 좋게 오늘 그 기분이었다. 오늘같이 안개비가 내리는 날은 깊은 숲 속에 있는 것 같다. 빌딩 숲 안에서도 나무들이 숨 쉬는 것 같은 느낌을 (아니면 환상을) 가질 수 있어서 특별하다. 이런 날 레몬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이 책을 읽으니 이대로 잠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순간이 있는 날이야말로 기쁜 날이다.


꾸준히 자라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어른도 늙는 게 아니라, 자랄 수 있다고 믿는 어른.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박연준


시인은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기분의 날에는 나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다.

얼마 전 유퀴즈에서 김혜자 님을 보고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입에서 나오는 말과 표정이 진실되어 보는 내내 눈물이 고였다 흘렀다. 젊음도 찬란하고 아름답지만 나이 드는 것도 아름답구나, 퇴적이 주는 단단함과 그 퇴적층마다의 빛이 있구나 생각했다.

내가 41살이니까 (만으로 하하) 인생의 반은 아이로 살았고 반은 어른으로 살았다. 나도 김혜자 님처럼 운이 좋으면 80살이 넘게 살 수 있을 텐데, 시인의 말대로 앞으로는 어른으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자라날’ 하루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인생이 꽤 멋지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직도 나이 드는 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이런 문장을 만나다니 행운이다. 주변에 그렇게 꾸준히 자라나는 할머니들을 보며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이상하게 흐를까 공상을 하며 몇 시간을 보냈다.


이번 주는 대체로 무기력했고 자주 나이드는 것에 두려웠으며 책도 읽어지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시를 외우고, 시를 외우며 눈 속을 걸었다. 이렇게 두고 보니 이만하면 괜찮은 한 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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