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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후나 Dec 26. 2022

제발 알려주세요.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낙관적으로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으로 올해를 시작했다. 1월 일기를 보니, 제목부터 심란하다. <나 저주받은 거야?>로 시작해서 <손대면 톡 하고 울어버리는 나>, <아, 땅 꺼진다.>, <첫 번째 심리상담>, 1월의 마지막 날은 <우울하고 어색한 설날>이었다. 조금이라도 제정신으로 하루를 살기 위해 일기를 썼다. 깜깜하기만 해서 보이질 않던 내 마음이 글로 풀어놓으면 해석이 되었다.


그때 나는 누가 말만 시켜도 울어버려서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래서 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난임생활이 길어지고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나는 일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인데, 일도 쉬면서 지내니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저에게는 일이 안식처라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어요. 역시 빼앗겨 봐야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나 봅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 인생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사주를 보러 가는 마음을. 후배의 이름과 인생을 바꿔준 역술인을 찾아 칼바람이 불던 날 역삼역 6번 출구 계단을 오르던 간절한 마음이 떠오른다. 친구들이 나오라고 해도 갖은 핑계를 대고 소파에 모로 누워 신서유기만 봤다. 유일하게 즐거웠던 것은 조카랑 노는 것이었는데, 일기를 보니 조카는 거의 구세주적 존재였다. 조카를 만나고 온 날은 비만 오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 잠깐 햇볕의 나라에 가서 우울을 말리고 왔다고, 적고 있었다.


이렇게 희망과 낙관이라는 감정이 꺾이고 꺾여 흔적도 남지 않다고 생각했던 유난히 춥던 날, 우연히 전시를 하나 보게 되었다.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바로 이곳에서 나를 정신 차리게 해 준 문장을 만났다. 박연준 시인은 좋은 시는 체했을 때 바늘로 손을 따는 것처럼, 나쁜 피를 흘려보낼 수 있을 만큼의 상처를 낸다고 했는데, 박완서 님의 <<나목>>의 이 구절을 읽고 딱 이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소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닮도록 절실하다. (중략)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RM이 인스타그램에 포스팅을 해서 박수근 전이 열리는 것을 알았었다. 고맙습니다. 남준 군.

내 상황을 다 죽어버린 고목이라고 생각했구나, 깨닫게 되었다. 나목일지도 모르는데. 빨리 결론 내버리려는 습관이 또 내달려버린 것이다. 아직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생각을 하니 상황이 아주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가는 방향으로만 계속 가려고 해서 영 방향을 틀지 못했는데,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글귀를 접하고 시선의 방향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물론 그날부터 희망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희망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니까. 마음 깊이 내 상황이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라는 것을 믿는 것에는 올 한 해가 다 들어간 것 같다. (사실, 아직도 노력 중입니다.) 전시 굿즈로 받은 스티커를 노트북에 붙이고 매일 봤는데 이것이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문장은 그렇게 가지런하게 내 눈앞에 있으니, 동지가 지나 하지가 오듯 매일 조금씩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봄에의 믿음’이라는 말에 큰 빚을 졌다. 그렇게 칙칙하고 의기소침하던 나를 일상의 나로 돌아가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이 말을 바라보며 올 한 해 동안 눈물을 닦고, 조금 씩씩해졌다. (이러니 제가 인생의 모든 답을 책에서 구하려고 합니다.)

박완서 선생님, 작가님의 이 말이 올해 내내 저를 곁에서 지켜주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희망이 줄어드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계 이런 일은 열심히 노력할수록 희망이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진다는 것도. 그러면 그만 두면 되지 뭐, 하고 빠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또 죽을 것 같이 힘들기 때문에 그것도 어려운 일이다. 거의 죽을힘을 다해, 다시 희망과 낙관을 일부러라도 되살려 놓아야 하는 상황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러면, 상황이 희망적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살려낸 희망이 아주 작은 씨앗이 되어 결국은 낙관적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봄에의 믿음'을 품고 한 해를 건너며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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