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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광 May 31. 2024

글 만드는 아침 (1)

양적완화

글을 쏟아내고 있다.

대개는 하루 55매 정도를 쓴다. 많게는 80매까지 쓰기도 하는데, 이쯤 되면 가령 내가 아까 아침을 먹기는 했던지, 먹었다면 당최 무얼 먹었던지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이 생긴다. 생활인의 습성 탓에 그 절반 정도로 마무리하는 날도 있기는 하지만, 25매 미만으로 내려가는 일은 잘 없다.

여기서 ‘매’라는 것은 200자 원고지 기준이다. 요즘 이 단위는 업계에서조차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것 같다. 보통은 글자 수로 센다. 이것은 웹 확장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모바일 환경이 주류가 되면서 거의 표준처럼 되었다. 원고지 시절에 많이들 써먹던 ‘줄바꿈의 트릭’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초도 분량을 계산할 때는 여전히 200자 원고지를 기준으로 한다.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대기는 하지만, 역시나 동아시아 작가들이 잘나가던 시절 사용했던 전통 있는 기준인 것이다. 그 권위도 영향력도 사라졌지만, 이후로도 쉽사리 잊히지는 않을 것 같다. 현시점 종이책의 위상과도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한컴 한글에서 별 트릭 없이 A4 기본 설정대로 글을 쓰면 한 장이 대략 10매, 즉 2,000자 내외다. 실무상 그보다 적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주석이 달리기 시작하면 장당 본문의 글자 수는 확확 줄어든다. 해서 최소 분량에 민감하던 시절에는 한 장을 7매 정도로 빡빡하게 잡았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간단히 10매로 계산한다.

그렇게 보자면 한글 기준 하루에 6장, 예전 기준으로는 8장을 쓰고 있는 셈인데, 이것은 이전의 집필 속도를 볼 때 그리 많은 분량은 아니다. 급히 쓸 때는 하룻밤 사이에 논문 한 편을 끝내기도 했으니까. 투고용 논문이라면 이런저런 부속을 포함해서 20장 정도가 나온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쓰고 반년을 놀았다. 지금은 8장 분량을 매일 써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뛰어난 작가들의 집필 분량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현대 일본 소설에 탐닉하던 때 보았던 것이라, 일본인 작가에 대한 기억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들의 작업 분량은 일반적으로 하루 25매 정도였다. 많이 쓴다는 작가도 하루 40매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여기서 언급된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 무라카미 하루키, 시오노 나나미 등이었다. 중견이나 대형이라는 수식어조차 실례가 될 시대의 거장들이다.

그렇게 겸손을 익혀가고 있다.



Posted on Instagram at 31 Aug 23
Cover Image from Unsplash by Thom Milkov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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