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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광 May 30. 2024

뱃놈 이야기

난(蘭) 치는 법을 반년 정도 배운 적이 있다. 스승은 매사에 꼬장꼬장한 데다 타협하지 않는 분이었다. 수염만 안 길렀다 뿐이지 가히 훈장님이라 불러야 할 법했다. 이 고루한 선생님이 틈날 때마다 해 주신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이것을 ‘뱃놈 이야기’라 이름 붙였다. 얼마나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는 이야기로, 그 내용은 이렇다.


먼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은 거대한 자연의 힘에 능히 맞설 수 있어야 한다. 한순간의 두려움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경험이 부족한 선원에게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인데, 그래서 술이 꼭 필요해진다. 풋내기에게는 술이라도 먹여서 겁 없이 덤비게끔 한다는 것이다. 파도보다 술부터 이기게 만들기 위해 꼼수를 쓴다.


입문하는 선원은 선배들과 함께 바다 가운데에서 술판을 벌인다. 큰 사발에 독주를 부어 넣고 순배를 돌린다. 좌에서 우로 한 번, 우에서 좌로 또 한 번. 연거푸 두 사발을 마신 풋내기는 곧 뻗어버린 채 바다에 던져진다. 짠물을 마신 그는 술을 모조리 토해낸다. 흡수되기도 전에 뱉어버렸기 때문에 취할 이유가 없다. 다시 마신다.


이런 식으로 밤새 술독에 빠진 풋내기는 더 이상 술이 두렵지 않다. 굉장한 방법으로 술을 경험해 보았기에 어지간한 주량은 우습게 보이는 것이다. 술을 배우는 방법이 이런 식이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술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뱃놈들은 취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물론 뱃사람도 취한다. 과음하면 여지없이 술망나니가 된다. 그러나 스스로가 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런 사실은 별 힘이 없다. 이들은 술을 물처럼 마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별다른 주도가 필요치 않고,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하더라도 취한 적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음주를 후회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음주 시의 행동도 대담하고 거침이 없다.


스승은 “그래서 선비는 뱃놈과 대작(對酌)하지 않는 법”이라는 말씀으로 늘 끝을 맺곤 하셨는데, 나로서는 ‘뱃놈’의 무용담 같은 이 이야기를 믿을 수도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 한들 甲에서 乙이 어떻게 도출되는 것인지 이해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 선생님이 또 ‘직업 인지 감수성’ 없이 차별적 발언을 하신다고 생각하며 한 귀로 흘리곤 하였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스승의 그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문인화를 갓 배우는 과정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데, 꼭 글자를 처음 배울 때와도 같다. 난을 치려면 우선 난 잎 그리는 연습을 하는데, 말이 난 잎이지 그냥 획 긋는 연습이다. 난은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니까 밑에서 위로 쳐올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서예와는 또 다른 재미에 붓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것이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면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멋없이 검게 물든 화선지가 잔뜩 쌓이는 광경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고루하신 스승을 재촉했다간 틀림없이 불호령이 떨어질 터, 궁리를 거듭하던 나는 하릴없이 몰래 난화법(蘭畵法)의 기초를 익히기로 결심하고 독본을 한 질 사들였다. 수업 중에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하던 대로만 충실히 하면 될 것이었다. 독학의 과정에 오류가 생기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스승께 제대로 된 방법을 배울 것이 아닌가? 그때마다 스리슬쩍 고쳐나가면 될 일이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난 치는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스승 앞에서는 사뭇 숙연하게 획 긋기에 몰두하고, 귀가해서는 대가인 양 한 폭 난을 휘갈겨놓고 자아도취에 빠졌다. 그러나 내 이중생활은 곧 박살이 났다. 평소와 똑같은 내 화선지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스승의 추상같은 출입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예의 그 말씀과 함께. “선비는 뱃놈과 대작하지 않는다!”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자고로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집안의 큰 어른이 직접 아이들에게 주도(酒道)를 가르친다고 하였다. 이때 아이는 단정히 앉아 어른의 지도대로 엄격한 예법에 따라 약주를 마셔나가야 한다. 애든 어른이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술의 쓴맛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아이는 이 맑은 물이 자신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잔을 거듭할수록 자신의 몸가짐을 되돌아보게 된다. 선원이나 마찬가지로 풋내기지만 태도는 상반된다.


문인화는 ‘화(畵)’라는 명칭이 붙어있기는 하나 글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문인화를 이루는 각 요소는 글을 이루는 문장이나 단어와도 같아서 다루는 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잘못된 단어 하나가 글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잘못 그어진 획 하나는 난화 전체를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고된 훈련을 거쳐 기본 획을 연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법에 맞추어 기초를 다지지 않고서야 ‘올바른’ 난을 표현해낼 도리가 없다.


한데 엉성하게나마 난을 한 번 쳐 본 다음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수련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미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성취감이 눈을 가리는 것이다. 결점을 찾아내어 극복하는 일도 요원해진다. 이미 큰 술을 경험한 풋내기가 자신이 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때나 진배없는 내 화선지에서 스승이 간파해 내신 것은, 혼자서 공부할 때의 잘못된 필법, 어느새 손에 익어버린 채로 떠올랐던 그 붓놀림의 한 조각이었는지도. 물론 문장은 꾸며야 멋이 생긴다. 그러나 꾸며내기 위해서는 틀에 맞게끔 획을 다듬는 과정부터 익혀야 한다. 정석(定石)을 익히지 않고서야 사활(死活)을 챙기겠는가.


아무렇게나 글을 휘갈기고 싶은 충동이 일 때면 “뱃놈과 대작하지 않던” 스승을 떠올린다. 사실 큰 선비는 뱃놈과도 대작할 수 있다. 스승은 어디까지나 풋내기끼리 만나지 않도록 엄히 단속하셨던 것이다. 선비든 뱃놈이든 ‘혼술’은 문제다. 조화롭고 훌륭한 글은 선비와 뱃놈의 대작에서 비로소 탄생한다는 아주 간단한 진실을 나는 그렇게 둘러 둘러 배워 가고 있다.



 《시사문단》21년 3월
 《가르침과 배움》 08년 10월 〈선비와 대작하기〉를 개작
 Cover Image from Unsplash by Samara Do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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