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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광 May 30. 2024

풋내기 수필가의 하루

오전.


어두울 때 일어난다. 네 시 반일 때도 있고, 다섯 시 반일 때도 있다. 한 컵 가득 냉수를 마신다. 몸을 펴서 돌려본다. 대체로 잠은 충분하고 기분도 좋다.


글 쓰는 장소는 고양이의 영역마냥 때때로 바뀐다. 요즘은 소파와 티 테이블 사이 좁은 틈이 작업 공간이다. 유난히 따뜻한 구역이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노라면 막내 고양이인 ‘자두’가 슬그머니 곁으로 와서 잠에 빠져든다.


스탠드를 켜서 국어대사전을 열 쪽가량 넘겨 본다. 노란 색연필로 적당히 밑줄을 그으며 읽는다. 삼십 분쯤 소요된다. 대사전은 받침으로도 훌륭하게 쓰인다. 서피스(Microsoft Surface)를 얹고 전원을 넣는다.


커피를 끓인다. 첫 잔은 무조건 믹스커피다. 물 150mL에 세 봉지를 저어 넣는다. 냉장고 정수기는 100mL 단위로 계량된다. 200mL를 받아서 한 모금 삼키면 얼추 양이 맞는다. 다음 두 잔은 네스프레소로 내린다. 해가 뜨기 전까지 그렇게 석 잔을 마신다.


선 블럭을 바르고,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과 검은콩두유를 조금씩 맛본다. 아침은 먹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간헐적 단식이 된다.


아홉 시에 잠깐 증시를 확인한다. 이때쯤이면 집안이 모두 깨어난다. 나는 아침 작업을 마무리하고 잠시 숨을 돌린다. 재테크 서적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을 훌렁훌렁 본다.


열 시쯤이면 오전 사이클이 끝났다는 느낌이 온다. 외출 일정이 없으면 맥주캔을 딴다. 두 캔이면 그럭저럭 적당하다. 아침의 거실은 밝다. 나는 볕을 받으며 고양이처럼 낮잠에 빠져든다.




이른 오후.


점심을 먹고 나면 피곤해진다. 일어난 지 여덟 시간 이상 지난 셈이니 당연한 일이다. 세 시 이십 분까지는 에프엠을 틀어 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쉰다.


세 시 이십 분에는 증시가 마감된다. 93.1MHz에서는 <명연주 명음반>이 나올 시각이다. 고3 시절부터 진행자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마니악한 프로그램이다. 진행자인 정만섭 선생이 물러날 때쯤 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KBS에 끈도 많이 엮어 놓았다.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녀석들이지만.

네 시 이후로는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단순 업무 위주로 작업을 구성한다. 가급적이면 창작은 하지 않는다. 시간은 배로 걸리고 퀄리티는 떨어진다.


슬슬 고양이들의 투정이 시작된다. 만져 주거나 곁을 지켜 주거나 해야 조용해진다. 어린 송아지만 한 고양이도 일하기 싫다며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안아 주면 조용해진다. 고양이들은 번거롭다.


오메가3와 비타민 D와 농축 카테킨을 삼킨다. 여섯 시가 되기 전까지는 작업에 효율이 붙지 않는다. 메일을 쓰거나 SNS를 정리하거나 아내와 함께 간식을 먹는다. 빨래를 돌리고 분리수거를 한다.




늦은 오후.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업장은 팩토리(factory)로 불린다. 작업자들은 앤디 코빼기도 보지 못한 채 일했다. 박봉에 고된 일이었다고 한다. 가끔 앤디의 매니저가 전화를 걸어와서 하던 작업을 뒤집었다. “여봐들, 앤디가 노란색 말고 검은색으로 다시 칠하래!” 작업자들의 속도 뒤집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앤디를 스크루지라 불렀다.


그럴듯한 일을 해내는 날이면 내가 스크루지 노릇을 한다. “레드향이 먹고 싶구나!” 아내가 깔깔거리며 레드향을 까서 바친다. 물론 이런 일은 잘 없다. 기본적으로 내가 그럴듯한 일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보통은 아내가 외친다. “뽕이 좀!” 그럼 내가 비척비척 뽕이한테 가서 울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라디오를 꺼놓는다. 귀도 휴식이 필요하다. 여섯 시부터는 다시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역시 고3 시절부터 바뀌지 않은 진행자다. 클래식 에프엠에 내 청년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자연스레 글도 감상적으로 흐른다. 이 시간에 철학 논문을 쓰면 외려 멋진 글이 나온다.


아홉 시에 습관처럼 뉴스를 튼다. 늦은 간식을 먹고 항우울제를 삼킨다. 십 년을 함께 지낸 약이다. 이제 익숙해졌다. 석 달 전에야 담당 교수님이 조심스레 한 알을 뺐다. 아직은 별 무리가 없는 듯하다.


약 기운이 돌 때까지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아내는 새벽까지 자지 않는다. 비틀거리며 침실로 향한다. 요즘은 대체로 숙면한다. 꿈도 꾸지 않고 잘 잔다.




번외편.


가끔 알라딘에 접속해서 중고 책을 사들인다. 주말마다 관악으로 가서 책을 빌리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학교 도서관에서는 신간을 구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예약 제도가 있지만 귀찮다. 알라딘에서도 신간이라고는 하나 반년쯤 이전 책부터 올라온다. 그보다 최신의 것이 보고 싶다면 별수 없이 새 책을 사야 한다.


구매 주기는 두 주 정도가 적당하다. 한 주 간격으로는 배송료를 아낄 만큼 여러 책을 찾기가 쉽지 않고, 한 달 간격은 목록을 넘겨 보는 일이 수월치 않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알라딘 직접 배송 상품을 ‘전체’ 정렬하여 본다. 제법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관심이 가는 책을 장바구니에 넣은 다음, 하나씩 열어서 목차를 살핀다. 목차를 검토하면 절반 정도가 날아간다. 보통 한 번에 십만 원어치를 산다. 가끔은 음반도 산다. 시중에서 절판된 희귀 음반이 종종 올라온다.


알라딘 중고서적은 바코드 스티커가 깨끗하게 떨어진다. 예스24 스티커는 자국이 남는다. 되팔 때 감점 요인이 된다. 알라딘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다. 대신 새 책은 예스24에서 산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취향 문제다. 교보문고는 어쩐지 잘 이용하지 않는다. 오프라인 매장은 자주 들른다.


알라딘에서는 샛노란 전용 중고박스를 구할 수 있다. 스무 권 정도가 들어가는데, 새 책과 헌책을 가리지 않고 읽은 순서대로 넣는다. 지퍼를 채우고 케이블 타이로 묶어서 내놓는다. 워낙 자주 내놓다 보니 택배기사님과도 친해졌다. 박스를 내다 놓으면 요즘은 연락도 하지 않고 덜렁 들고 간다. 배송 사고가 난 적은 한 번도 없다.


학사 때는 자기가 다 아는 줄 알고, 석사 때는 자기만 모르는 줄 알며, 박사 때는 남들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과거에는 실용서를 탐독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숨겼는데, 요즘은 딱히 감추지 않는다. 진리가 하나일 수 없고, 지식에 편견을 가질 이유도 없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는 것은 엎어 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다.



 《시사문단》 21년 3월
 Cover Image from Unsplash by Hannah Ol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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