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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리 Eunli Dec 29. 2020

수영을 배우는 목적

왜 왔냐고요? 죽기 싫어서요.

2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수영을 배웠다. 내가 처음으로 수영을 등록했던 곳은 첫 수업 전날, 무려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수영장이었다. 수영복을 갈아입고 어디로 나와야 하는지 견학도 시켜주고, 간단한 진도표도 공유했다. 수영장이란 공간 자체가 낯설었던 탓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갑자기 엄청난 미션이 떨어졌다. 

 

“서로 자기소개라도 할까요?”     


난생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난생처음 배우는 수영과 나를 소개하라니! 낯을 가리는 데다가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하는 나는 차례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물에 빠져 죽고 싶지 않아서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 거창하게 대답했는지, 아니, 아무리 사실이라도 저런 자극적인 단어를 쓸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당시에는 생각나는 게 그것뿐이었다. 자기소개 시간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머릿속에서 몇 번을 곱씹어 가장 무난한 대답을 만들었을 텐데(아니면 그냥 빠졌을텐데!), 허를 찔리면 나도 모르게 솔직히 대답하게 된다.     


(출처: 픽사베이)


운동을 정말 정말 싫어하던 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렇게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오자 마자 자는 생활이 반복된다면 문자 그대로 ‘죽을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나에겐 물 공포증도 있었다. 신나서 바나나보트를 탔다가 물에 빠져 구명조끼를 입고도 패닉에 빠져 있자, 같이 갔던 친구가 날 강 한 가운데서 물가까지 목을 잡고 끌어주며 “넌 진짜 수영 좀 배워야겠다” 하기도 했다. 정말로 죽지 않으려면 수영을 배워야만 했다.


내 목표는 단순했다. 물에 뜨고, 앞으로 나가고, 무엇보다 발이 닿지 않는 물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처음 내 꿈은 그냥 ‘수영을 하는 사람’이었다. 수영을 하면 하고, 못하면 못하는 거지, 내가 ‘수영 잘하는 사람’이 될 수 있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자기소개를 통해 수영강사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싶었던 거였다. ‘저는 수영을 못하고 물을 무서워하는 편이니 진도가 유난히 느려도 이해 좀 해주십쇼, 신경도 써주시면 더 좋고요…’ 물론 그 신호는 강사에게 무사히 도달하지 못했고, 3주쯤 나가다 수영장을 그만뒀지만.     


*     


한 달 뒤에 다른 수영장에서 수영을 다시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 3주나 예습하고 간 덕분에 새로운 수영장에서의 적응은 아주 조금 빨랐다. 다 같이 못하니까 앞뒤로 ‘무서워요’, ‘저도요’ 대화를 나누는 것도 동지 의식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운동을 한 시간이나 해도 땀이 안 나는 게 제일 좋았다. 아, 시간이 빨리 가는 것도 너무 좋았다. 한 바퀴 열심히 돌고 오면 오 분이나 지나 있다니!


그래서 2년이나 지났으니까, 이제 수영할 줄 아냐고? 음…. 하기는 한다. 남들은 몇 개월 안에 졸업하는 중급반에서 머무는 중이란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물속에 머리를 박고 ‘음파’ 연습하는 것도 무서워서 제일 먼저 고개를 뺐던 내가 이제는 가능한 한 숨을 안 뱉고 오래 버티려고 한다(속도가 너무 느리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면 어쩔 수 없다. 내 숨을 포기해야지). 

제일 좋아하는 영법은 배영이다. 특히 팔은 안 쓰고 발차기만으로 레인을 돌 때면 배 위에 올린 두 손을 꼭 잡게 되는데, 그러고 있으면 꼭 보노보노가 된 기분이라 웃음이 나온다.      


*


여전히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50미터쯤은 어렵지 않게 도달하는 사람이 됐다. 발차기만큼은 꽤 자신 있다. 나는 여전히 수영을 못하지만, 동시에 아주 작은 것이나마 특기 분야가 있는 사람이 됐다!


지금도 운동은 싫지만, 수영은 하고 싶다. 과거의 나에게 호텔 수영장은 고려 요소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예약할 때마다 꼭 작더라도 수영장이 있는 곳을 기웃거린다. 수영장의 옅은 소독제 냄새가, 몸을 감싸는 차가운 느낌이 평소에도 문득문득 생각 난다. 무엇보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내가 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됐다고? 수영 때문에 내가 아주 조금이지만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 들 때마다 신기해지곤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날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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