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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in Pangyo Apr 26. 2019

워킹맘, 정신과에 다녀왔습니다.

#잘하면 네 덕, 못하면 내 탓

퇴근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퇴근 시간이 5시간이 지난 10시 반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급한 일은 끝냈고 더 이상 일은 못하겠는 그런 시간이 됐습니다. 일을 30분만 더하면 야근 교통비로 택시를 타고 갈 수 있었지만, 30분을 더 남아있기가 싫었습니다. 아니, 단 1분도 더 그 자리에서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택시비 3만 원을 포기하더라도 지금 집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더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일어나서 나가야 하는데 버스 정류장은 커녕 사원증을 찍고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갈 힘도 나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4시간도 자지 못하고 일을 했던 지난 3달 동안,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업무와 벼랑 끝까지 저를 밀어붙이는 팀장님에 대해 화가 목구멍까지 쌓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퇴근이 기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었고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멍했습니다.

그렇게 꺼진 모니터를 한참 동안 멍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우울증이었습니다. 우울증일 것이라고 느낀지는 꽤 오래됐는데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에게 아직은 조금 더 견딜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갈 힘도 나지 않던 그 날, 꺼진 모니터에 비친 넋이 나간 저의 모습을 보고 결심했습니다.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정신과에 가야겠다고 말입니다.




      


다음 날은 마침 혼자 외근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반포역 근처에서 MD 인터뷰를 마치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정신과 간판만 찾았습니다. 오늘 가지 않으면 또 기약 없이 미룰 것 같아 눈에 들어오는 정신과로 무조건 가자는 마음이었습니다. 30도쯤 고개를 위로 치켜든 채, 무언가를 쫓는 눈빛으로 입을 살짝 벌린 채 건물 간판만 쳐다보며 걸었습니다. 드디어 간판을 찾았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건물에 들어서서 병원 입구를 찾았습니다.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저에게 경비원 선생님께서 말을 거셨습니다.      


“어디 찾으세요?”

“정신과 간판 보고 왔는데요.”

“아, 거기는 없어졌어~ 없어진 지 좀 됐어~.”

라고 하시며 발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순간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걸었지만 병원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체념을 하고 집 근처로 검색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꺼내던 찰나, 길 건너편으로 정신과 간판이 보였습니다. 꼭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친구처럼 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 동안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제 발로 정신과에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심리학 전공생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긴장되었습니다. 분노나 화남도, 기쁨이나 즐거움도, 설렘이나 두근거림도 느껴본 적이 언제인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정신과로 향하는 길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제가 죽지 않고 살아있구나 싶었습니다. 제 마음이 더 다쳐서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스스로 아픈 것을 인지하고 병원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30문항 정도로 이루어진 우울증 검사 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우울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10분 전만 해도 외근을 나온 일반 사무직이었는데, 우울증 환자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속이 시원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조직 개편으로 직무를 이동하게 된 이야기, 원래 담당자는 바로 퇴사하여 인수인계도 제대로 못 받은 이야기, 이런 상황에서 일을 익히려면 “삽질”이 필수적이라며 일을 가르쳐주지 않는 상사 이야기, (술을 드시고) 어디까지 긍정적인지 한 번 밟아줘야겠다고 이야기하는 팀장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정이나 요구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무조건 주어진 일을 해내고자 하는 의지와 그에 비해 부족한 능력으로 인해 좌절하는 저의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조용히 듣고 계시던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최은미님이 하셔야 할 건 일을 더 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펑크 내보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다할 수 없는 과한 업무를 받았는데 해내는 게 이상한 거죠.”     

“일을 펑크를 내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주어진 일을 해내지 못한다는 가정 자체를 해 본 적이 없기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을 해봤습니다.

짧은 침묵 속에 다시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큰일이 일어날 것 같죠? 그 일이 펑크 나도 회사에 큰 타격이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펑크를 내야지 얘가 진짜 힘들구나 하고 업무가 조정이 되는 거예요.”





귀인 이론 : 야근이 잦고 일이 쌓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어떤 일이 발생하면 그것이 왜 일어났고, 왜 그렇게 됐는지 원인을 찾고자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귀인 이론’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행동의 원인을 그 사람의 성격이나 타고난 기질처럼 내적인 요소에서 찾는 내적 귀인(internal attribution)을 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행동의 원인을 외부 상황이나 환경적 요인에서 찾는 외적 귀인(external attribution)을 합니다. 예를 들면, 지각을 하는 동료를 보고 ‘저 사람은 원래 게으른 사람이라니까’라며 내적 귀인을 할 수도 있고, ‘오늘 차가 좀 막혔거나 사정이 있었나 보네’라며 외적 귀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본인의 잘한 행동에 대해서는 내적 귀인을 하는 반면, 본인의 부정적 행동에는 외적 귀인을 하는 귀인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잘하면 내 탓, 못하면 네 탓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타인의 잘한 행동에 대해서는 운이 좋아서라며 외적 귀인을 하고, 타인의 부정적 행동에는 ‘원래 저런 사람이야’라며 내적 귀인을 사용하고는 합니다. 이러한 오류는 너무 즉각적으로 나타나고 자주 범해서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라고 하는데, 이는 본인의 자존감을 지켜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 반대인지 모르겠습니다.

야근이 지속되고 처리하기 버거운 일은 계속 주어지는 상황에서 저는 “아, 내가 좀 부족한가 봐.”라고 내적 귀인을 합니다.  “이 회사 조직문화가 진짜 이상해” 또는 “팀장이 일 분배를 너무 못했네.”라고 외적 귀인을 하면 편할 텐데, 자꾸 초점이 저에게만 맞추어지고 부족한 제 모습이 보입니다.     


문제는 귀인 방향에 따라서 추후 행동 방향도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업무를 처리하지 못하고 야근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환경'이나 '팀장의 리더십'처럼 외부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은 환경을 바꾸거나 팀장님에게 의견을 개진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본인의 기질'이나 '능력'같이 내부에서 원인을 찾는 사람은 “아, 내가 조금 더 노력해야지”라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랑하지 말아라, 겸손해라 라는 가르침을 받아서 그런 것일까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부족한 제 탓인 것 같고, 반면 일이 잘 풀리면 타이밍이 좋았거나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날 상담에서는 참 남 탓을 많이 했습니다. 조직에 대한 불평불만도 많이 털어놓았고, 상사에 대한 흉도 봤습니다. 남 탓이라고 생각하니 일이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아무래도 이직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저의 말에 의사 선생님은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퇴사를 하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죠. 다른데 가면 다를 것 같아요? 처음부터 인간관계 다시 맺어야 하고 더 힘들어요. 진짜 퇴사할 마음이 있으면, 그 힘으로 회사 내에서 방법을 먼저 찾아보세요. 진짜 퇴사할 용기 있어요? 그럼 그 용기로 병가를 먼저 써보세요. 좀 쉬시라고요.”     


어느 조직에 가나 똑같은 상황을 마주할 수 있고,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문제들이 그렇듯이, 저의 선택만이 남은 순간이 왔습니다.

어쩌면 지금 놓인 상황이 문제에 대처하는 저의 방식을 달리해보는 테스트를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 오히려 일이 잘 풀리면 내 탓, 잘못되면 남 탓도 해보고, 조직에서 목소리를 내 보는 연습도 해 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피식 났습니다.      


몇 번의 상담을 받고 난 후, 의사 선생님은 더 이상 병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저는 저의 내적 귀인 성향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말씀드리며 정신과 치료는 중단하더라도 심리상담 치료를 지속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아직도 저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 성향은 최은미님의 단점이 아니라 강한 무기예요. 지금 조직 환경이 그걸 이용하려고 해서 그렇지,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아주 큰 장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요즘 회사에서 풀리지 않는 일이 있으시지는 않으신가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꾸만 자기가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계시지는 않으신가요?

우리 엄마들, 잘하면 내 탓, 못하면 남 탓으로 조금 돌리셔도 됩니다. 오죽 흔하면 '기본적 귀인 오류'라고 이름 붙여졌을까요.


오늘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PS. 저는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퇴사는 못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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