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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in Pangyo Apr 17. 2019

워킹맘, 책임감과 강박증 사이

#복직 후 찾아오는 감정 2.


집으로 돌아가는 길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봄비치고는 비가 꽤나 세차게 내렸던 그 날, 라디오에서는 비로 인해 미세먼지가 걷힐 것을 기대하는 기상예보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귀가하는 길 안전 운전을 하라는 메시지도 귀에 들어왔습니다. 비 오는 날 운전은 처음이라서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미세먼지나 운전 길 걱정보다 제 마음속에서는 벚꽃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과 꽃놀이를 가야 하는데, 오늘 비로 벚꽃이 다 떨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벚꽃은 남편과 저, 첫째 주완이와 셋이 함께 봤는데 이번에는 주하까지 있는 첫 봄입니다. 네 가족이 함께 맞이하는 첫 봄을 기록해 놓고 싶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여기저기 꽃놀이 사진들이 올라오는데, 나도 우리 아이들하고 예쁜 사진 좀 찍게 꽃아 떨어지지 말아 줘..라고 생각할 때 저는 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뒤통수를 쿵 하고 쳤습니다. 몇 초 사이에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가 들어오더니 손이 덜덜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난 것입니다.  저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초보 운전에 비 오는 날 일어난 교통사고여서 많이 당황하고 긴장을 했나 봅니다. 그 날밤 온몸에 열이 나고 몸이 축축 쳐졌습니다. 열이 나는 것도 모르고 신음소리를 내며 잠을 잤던가 봅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이 밤에 열이 나서 잠옷을 벗겨줬다고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오빠, 몸도 안 좋고 렌터카는 아무래도 무서워. 그냥 5시간 걸리더라도 버스 타고 갔다 와야겠다.” 


라는 저의 말에 남편이 대답합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내일은 못 간다고 말씀드리는 거 어때? 교통사고 나서 차 수리 맡겨서 2시간 30분 넘게 버스 타고 와서 지각했어요.라고 말씀드리면 어이쿠 잘 왔다,라고 하겠어? 다들 좀 쉬지 왜 왔냐고 하지 않겠어?”      




아차... 싶었습니다. 그렇네, 미리 못 간다고 말씀드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남편이 천재처럼 느껴졌습니다. 동시에 이런 제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또 왜 당연히,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씩씩하게 연구실로 출근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당위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지!’라는 생각을 의미합니다. 인지-정서 이론에 따르면 이러한 당위성이 심해져서 비합리적인 신념을 이루게 될 때 개인이 파멸에 이르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위성에 대한 범위는 사람마다 정말 다릅니다. 그런데, 워킹맘들은 대부분 상당히 비슷한 당위적 신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내가 맡은 일이면 무조건 최선을 다해야지”

"내 일은 내 힘으로 스스로 처리해야지”

“내가 만약 이 일을 실패하면 사람들이 아이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주변에 신세를 지는 일이야”

"아파도 일은 가야지"
“아파도 할 건 해야지”

“내가 맡은 일인데 내가 없으면 보고가 엉망이 될 거야”    




제가 주로 어떤 선택을 할 때 생각하는 가치관입니다.

저는 맡은 바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일 뿐이고,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특수대학원 석사 시절 같은 심리학과 동기들은 이런 저를 보고 걱정스럽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워킹맘들이 유난히 강박증이 심하다고 말입니다.     



일과 육아, 가사일 그리고 학업까지 병행하면서 마음과 체력의 괴리가 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크다 보니 점점 지쳐갔습니다. 그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받기보다는 유난히 더 제 힘으로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러게, 그렇게까지 일을 해야 해?”라고 무심코 내뱉은 말에 꼭 증명이라도 해야 한다는 듯이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면 또다시 ‘그러게, 그렇게까지 공부를 해야겠니?’라고 이야기할 것만 같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그냥 아프더라도 일하고, 혼자서 참고, 잠을 줄이고 손톱을 뜯어서라도 내 힘으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이미 잘하지 못하고 있고, 또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어도 그 실제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깊은 마음속에는 “나는 반드시 잘 해내야 해”라는 자신에 대한 당위성에 사로잡혀 중요한 타인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일에 성실하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강박에 몰아넣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임신 때 9주 차에 유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 년 가까이 기다리다가 소중한 생명이 찾아왔습니다. 임신테스기에 두 줄을 확인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임신을 확인한 날부터 하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첫날은 소변을 볼 때 피가 섞여 나와서 착상혈인가 했는데, 둘째 날부터는 걷고 있는 중에도 생리하듯이 다리 사이로 피가 쏟아졌습니다. 일요일이라서 급하게 응급실에 다녀왔습니다. 한 번의 유산 경험이 있고 하혈이 심하니 움직이지 말고 누워만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당장 4일 뒤에 일본 출장이 잡혀있던 것입니다. 비행기, 호텔, 미팅까지 확정된 상태였습니다. 팀장님과 저 둘이 가는 출장이었습니다.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출장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가장 컸습니다. 혹시나 또 유산이 될 수도 있는데 너무 초반에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실도 부담으로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할지 많이 고민을 하다가 계속 이어지는 하혈에 회사에 임신 사실을 알리고 출장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위험 판정을 받아 출산휴가를 미리 당겨서 회사도 두 달을 쉬었습니다. 만약 두 번째 임신 때 겪은 유산이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또 출장에 가는 어리석은 선택을 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의 출산휴가 요청에 팀장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출산휴가 말고) 출근을 했다가 몸이 아프면 퇴근을 하면 안 되는 거야?”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계속 눈물만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요.. 아기를 꼭 지키고 싶어서요..라는 말을 하면서 울었던 것 같습니다.




이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얻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가 열심히 해서 잘하려고 하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사실이 애초에 저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책임감 위에 타인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옷을 두껍게 입는 순간, 성실과 책임은 나를 옭메는 강박으로 변하게 됩니다.



열심히 하는 것은 100% 저의 영역이고,
잘하려고 하는 것은 50% 정도 저의 영역이지만,
인정을 받는 것은 저의 영역이 아닙니다.



평가를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타인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해도 잘 못할 수도 있고, 잘해도 평가를 잘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책임감을 더 부여해줘야 하기도 하지만, 워킹맘들에게는 책임감을 조금 내려놓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프면 쉬어도 됩니다, 내가 없다고 그 날 보고가 엉망이 되지는 않습니다.

현재 처한 어려움을 공유하는 것이 책임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신세를 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은 서로 돕고 도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이틀을 쉬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걱정하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두들 저를 걱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설령 그들이 저를 걱정해주지 않고 맡은 바 일에 책임을 다하라고 피드백주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치관으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 피드백을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않을 자유는 저에게 있으니까요.



우리 엄마들 모두, 아프고 힘들면 조금 쉬어가도 됩니다.

조금 쉬어갈 만큼은 충분히 애쓰고 고생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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