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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in Pangyo Mar 03. 2019

눈치가 빠르고 배려심이 많은 쫄보 워킹맘입니다.

 #프롤로그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습니다. 항상 만원인 엘리베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꼭 타야 합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지하 3층에서부터 지상 6층까지 걸어 올라가기는 너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엘리베이터에 몇 명의 사람들이 내리고 기다리던 몇 명의 사람들이 재빠르게 올라탑니다. 그 짧은 사이에 ‘아는 언니’를 발견하고 눈인사를 했습니다. 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연년생 남매를 키우느라 육아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작 지하 3층에서 3층까지 올라왔을 뿐인데, 출근길 강남역같이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13kg가 넘는 아이를 안고 있자니 온 몸에 땀이 납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내리는 3층 문이 열렸습니다. 저는 6층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잠시 내려서 사람들이 내릴 수 있도록 기다렸습니다. 3층에서 내린 ‘아는 언니’가 저를 보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이제 곧 복직이지? 좋겠다. 엄마는 일하면 좋데. 아이가 불쌍해서 그렇지. 아무튼 힘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가 들은 말이 맞나?’

라고 생각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합니다. 일단 아이와 함께 재빠르게 올라탔습니다. 이후 제가 진짜로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을 깨닫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아이를 불쌍해합니까? 당신이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귀한 내 자식 신경 끄고 당신 아기나 잘 키우세요!!! 제 아이는 제가 책임지거든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마음속으로만 말이죠..


저는 눈치가 빠르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니까요.

다른 말로 하면 저는 쫄보입니다. 그냥 쫄보도 아니고 대.왕. 쫄보입니다.



다음 번에 그 언니를 마주치면 교양있게 살짝 웃으면서 이야기하리라 다짐하며 일기장에 멘트를 적어봅니다.

쫄보들은 당황하는 순간에 동공지진이 일어나거나, 몸이 얼음처럼 굳어버리는 현상이 발생하고는 합니다. 동공지진이 멈춘 후에는 힘을 준 눈에서 눈물이 갑자기 흘러내릴 때도 있고, 뒤늦게 화가 나서 억울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미리 대본을 써서 준비를 해야합니다. 

    

‘언니, 제 아이는 하나도 안 불쌍해요. 그래도 제가 심리학 전공이잖아요? 엄마가 아이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이를 불쌍하게 만드는 거예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언니가 더 불쌍하네요^^’ 정도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화를 내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얼굴은 빙그레 웃으면서 여우 짓을 하는 '빙그레 *년'이 되는 것이 저의 지향점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 언니를 다시 마주쳤습니다.

그녀를 마주치면 말하려고 준비한 대사들이 생각나면서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저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드디어 웃으며 펀치를 날릴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입을 꽉 다문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아는 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가벼운 눈인사만을 하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저는 정작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반갑게 인사하지 않고 옅은 미소로 눈인사만 하는 것이 제가 반갑지 않은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원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는 프레임을 형성한다지만, 워킹맘이 된 이후로는 본인의 호기심인지, 배려인지, 자신의 상황을 정당화하기 위함인지 모를 질문들이나 조언을 유독 많이 받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분노하고 많이 화가 났습니다. 억울했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만삭까지 자정 가까이에 퇴근하고는 했습니다. 첫 번째 복직 후에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습니다. 매일 아침 6시 10분에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을 해서 15시간이 넘도록 일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만 아이를 보고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제가 만족할 만큼, 또는 내가 주변에서 인정받고 싶은 만큼까지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결혼 전에 아이는 적어도 둘은 낳아서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 명을 낳아 키우면서 일을 해보니 하나로도 너무 벅찼습니다. 둘째를 가져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이 반복될 쯤에 두 번째 생명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10주 차에 유산을 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육아와 가사를 하느라고 하루에 4시간씩 자는 시간이 3년이 이어지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습니다. 어느 날은 퇴근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는데도 의자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컴퓨터를 종료할 힘도,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갈 힘도 없었습니다. 우울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엄마가 된 여자인 제가 왜 일을 하는지 계속해서 물어봤습니다. 끊임없는 주변의 물음 속에서 일도, 육아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지금은 벌써 첫 아이가 6살, 둘째가 2살입니다. 품위를 유지하면서 펀치를 날리고 싶었던 쫄보 엄마는 결국 펀치는 날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차별인지도 모르는 은은한 차별과 차가운 시선 속에서 저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일을 할 때 마주치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대답을 하기 전에 저에게 솔직해지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쌓고 세상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30년 후배인 제 딸이 제 나이가 되었을 때는 보다 중요한 일에 온전히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람으로 마음이 불편한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제가 배운 심리학 지식과 경험들을 활용하여 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 과정들이 세상을 향해 강력한 펀치 한 방을 날릴 준비 시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연재를 마칠 즈음이면 저도 대왕 쫄보는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 빙그레 샹년: 얼굴은 웃으면서 타인에게 무례한 말을 내뱉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비속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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