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연이 아닌 인연이 닿아 만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한 지가 벌써 7년이 훌쩍 넘었다. 가장 처음으로 만난 아이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삼 남매'였는데 나도 셋을 비슷한 터울로 길렀던 터라 그 시절의 내 아이들이 자꾸 오버랩이 되어 즐거웠다. 그렇게 서너 달 사귀다가 겨울방학 즈음엔가 헤어졌다. 그리고 몇 달 '4살 여자 아이'를 돌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첫 만남 당시 한 살과 세 살이었던 '두 자매'가 각별하다. 어린이 집을 거쳐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쌓은 즐거운 추억들이 종종 새록새록 떠오를 때면 소식도 궁금하고 많이 보고 싶다.
이곳으로 이사한 후에는 말문이 트이지 않은 '18개월 남자 아기'를 만났는데 대꾸 없는 아이를 바라보며 쉴 새 없이 혼자 이야기를 주고받는 기이하고도 재미있는 몇 달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어린이 집 같은 반에서 제일 말을 잘하는 "왜요?"를 연발하는 개구쟁이 사내아이가 되었다. 요즈음은 끊임없이 새롭고 알기 쉬운 대답을 해주느라, 나의 창의력과 어휘력을 풀가동 중이다.
돌아보니 나는 스스로 베이비 시터라는 말이 성에 차지 않았다. 일단은 부모가 요구한 필요를 충족시키되 그와는 별도로 아이를 향한 나만의 에너지가 나를 매번 부추겼다. 행동과 말투를 바로잡고 마음과 등을 도닥이고 그러면서 한글을 가르치고 동화를 읽어주되 연기를 덧붙이고, 심지어 집에 있는 영어동화책까지 들고 와서 영어에 흥미를 유발하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커가는 즐거움과 뿌듯함을 느낄 때마다, 이 보석 같은 시간에 함께하지 못하는 그들의 부모가 안타깝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집순이인 나를 일으켜 걷게 하는 운동 길이였고 함께 깔깔대는 웃음은 보너스였다. 그리고 주말마다 통장에 찍히는 수고비는 요긴하게 쓰였다.
지난주에 이어 계속 날이 좋은 이번 주 내내, 나는 어린이 집에서 빠져나온 아이와 놀이터에서 한 시간가량 놀다가 들어간다. 그네를 밀면서도, 종종종종 아이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도, 혹여 다치는 일이 없도록 눈을 고정시키고 쉴 새 없이 말을 한다. 자연스럽다.
그러나
맨 처음 두 자매를 데리고 놀이터에 갔을 때에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이제는 어른이 된 내 아기들이 생각났다. 나는 우리 애들과 함께 놀이터에서 놀아준 기억이 없다. 한 개도 두 개도 아닌 희한한 방에서 올망졸망 세 아이를 낳고 살던 곳 근처에 놀이터는 없었다. 그네를 밀 때 "더높이! 더높이!"를 소리치거나 시이소를 안고 타며 "쿵더쿵, 쿵덩쿵!"을 하지도 않았고, 구름다리를 건널 때 "그렇지! 힘내!"를 연발하지도 않았다. 달팽이 미끄럼 끝에서 "짜잔!!"" 안무섭다구?!""대단한데?!" 외칠 수 없었다.
요즈음 나는 놀이터에서 내 아가들 대신에 내가 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