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동갑인 이종사촌이 두 명 있다. 엄마와 이모들이 함께 배가 불렀을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난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우리는 엄마들 셋이 모일 때마다 딸려 만나게 되는 처지로 친구 같으면서도 뭔가 더 친밀한 묘한 사이였다.
두어 달 먼저 태어났다고 자기가 오빠라고 우기던 녀석보다 그런 건 개이치 않던 여자 사촌과 나는 더 친했다. 한의사였던 이모부의 강권으로 한자를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웠고, 어마어마하게 책을 읽는 그녀는 교내외 글짓기 대회를 휩쓴다고 했고 나는 종종 그녀의 말솜씨에 감탄했다. 어느 해 여름방학, 놀러 갔던 이모집 사촌의 방에서 할리우드 미국영화와 배우들의 사진이 꽉 채워진 'SCREEN' 잡지를 보았다. 그것에 통달한 사촌이 더 놀라웠다. 그리고 나도 그날 이후, 책 말고도 팝송을 포함한 잡학에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젊었으면 좋겠다는 실현불가능 바람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던 어린 내가 결핍을 느낀 것은 이모집에 가득한 책이었다.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여자 사촌의 박식함이 부러웠던 나는 집에 온 책 외판원의 책을 모조리 사달라고 엄마에게 말했었고, 가방 끈 짧은 엄마는 본인의 한을 풀듯 냉큼 냉큼 책을 사주었다. 내 방은 책과 전축과 레코드로 채워졌다.
캠퍼스를 거닐자 마다 나는 연애를 했고, 나의 남자 사촌은 재수를 했다. 내가 첫사랑을 박살내고 헤맬 때 그 녀석은 명문대에 입학해서 신세계를 경험했는데 동시에 이때 엄마들의 인생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큰 이모는 폐결핵이 악화되고, 우리 엄마는 과부가 되어 집까지 잃었고, 다른 이모는 이혼을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리나라의 정치, 문화, 사회를 비판했던 그녀는 자신의 엄마를 남겨 두고 아빠를 따라 미국으로 가버렸는데 더 많이 공부한다더니 얼마 되지 않아 미국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셋의 역사는 그렇게 이십 대에 매듭지어진 듯하다.
수십 년이 흐르고 전해 들은 내 사촌들의 마지막 소식은 이렇다. 미국에서 슬하에 자식 없이 부를 축적하던 그녀는 낯선 신흥 종교에 전 재산을 헌납하며 산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 둘이 매우 명석하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남자사촌의 소식은 끊겼다. 굽이진 엄마들 인생 속에 얽혀있던 나의 사촌들이 다들 평안한 말년을 보내길 바란다. 다만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써서 내가 부러워하던 그 사촌이 나는 여전히 아깝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