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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미 Apr 01. 2022

운명 vs. 선택

초 단편

중매쟁이가 찾아왔다. 선이 언니에게 좋은 남편감이라고 한다. 돈도 많고 인물도 좋고 평판도 좋은 신사라고 했다. 게다가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이 집구석 살림살이에 선이가 그 집으로 시집을 가기만 한다면,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중매쟁이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나이 차이였다.


그러나 선이도 허물이라면 허물이 있는 있는터라 이 중매는 이쪽에서 남는 장사라고 했다. 신사는 아내를 잃은 지 꽤 되었고 슬하에 이미 자녀도 여럿 있지만 아이들은 다 커서, 새 각시는 신경 쓸 일이 없을 거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엄마와 선이는 꽤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듣고 만 있었다. 중매쟁이는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혼인을 하면 이 중년의 신사는 처가의 광에 쌀이 떨어지지 않게 해 줄 뿐 아니라, 아마도 선이 아래로 줄줄이 있는 동생들의 학비도 계속 대 줄 거라고 귀띔했다.  중매쟁이의 끝도 없는  신사에 관한 이야기를 연이는 엄마와 언니 곁에서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연이의 언니  이미   ,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아이도 가졌었다. 그러나   양반이었으면 무엇하나? 전쟁 통에 건질  하나 없이 풍비박산  가난한 집의 맏딸인 선이를  남자의 부모는 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선이는 온갖 구박을 견디다 아이마저 품에서 뻬앗기고 시댁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공장으로 일을 나가야  했던 그때, 혼처가 들어온 것이다. 이야기를 한껏 마친 중매쟁이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선이는  중년 신사를 만나볼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녀의 엄마도 딸에게 만나보라  참이었다.


동생 연이는 고난한 하루가 끝나가는 해 질 녘이면 강둑에 나가 하염없이 앉아 있곤 했다. 지는 해를 볼 때마다 가슴에도 노을 지듯 편안하고도 서글펐다. 연이는 전쟁 중 세상을 등진 다정한 큰오빠가 그리웠다. 연이에게 들려주던 이야기들은 동화 같았다.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는 말을 기억하고 연이는 종종 미소 지었다. 언젠가 둑방 강둑에서 연이는 오빠의 친구인 성재 오빠를 만난 적이 있다. 오빠와 닮은 사람... 연이는 가끔 설레는 마음으로 성재가 보고 싶어 둑방 강둑으로 달려갔다. 어렵게 살기는 매 한 가지이지만 그는 비관하지 않고 늘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오빠처럼... 연이는 그가 좋았다. 성재 오빠는 속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경무대에 들어가서 일하는 게 꿈이라는 말도 했지만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어서 가끔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며 손에 들고 온 책을 연이에게 건네주고는 그저 함께 석양을 바라보는 게 다였다.




온 식구들은 선이의 혼담에 흥분했다. 연이도 중매쟁이가 말한 그 멋진 신사가 궁금했다. 보고 싶었다. 날이 정해지고 언니가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날, 연이는  언니에게 물어봤다. "나도 따라가도 돼?" 선이는 그러라고 했다.


선이 언니와 신사는 조용하고 정갈한 방에서 만났다. 신사는 자신의 작은 어머니와 함께 나란히 자리했고, 중매쟁이와 함께 온 연이는 언니의 등 뒤에 앉았다. 그리고 가끔씩 그가 말을 할 때면 연이는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형부가 될 수도 있는 중년 신사를 훔쳐보았다. 한창 젊었던 시절에는 마음만 먹으면 꽤 많은 여심을 흔들었을 듯 한 반듯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며 태도도 무척 점잖았다. 간간히 잔잔한 웃음을 보일 때면 지금도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작은 어머니의 표정도 좋았다.




며칠이 흘렀다. 드디어 중매를 했던 아주머니가 다녀가셨는데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다. 신사의 본마음이 전달되었다. 그의 마음은 언니 뒤에 앉아 있던 연이에게 닿았다. 애초에 혼담이 시작되었던 선이는 그의 마음 밖으로 밀려났다. 엄마는 우셨다. 선이도 연이도 울었다. 엄마는 언니를 따라간 연이를 꾸짖다가 또 우셨다.  식구들의 밥그릇을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매번 끼니를 때웠어도, 눈덩이처럼 밀린 싸전의 외상값 독촉이며 또 앞으로 먹고 살 일이 막막했던 엄마. 이 혼인 만이 마지막 방도라고 여겼는데 둘째 딸이라니....


몇 날 며칠을 우시고 난 후 엄마는 연이를 불렀다. "연이야, 네가 우리를 좀 살려야겠다. 또 너도 빌어먹듯 가난하게 살면서 배를 곯면서 목숨만 부지해 십 년을 사는 것보다, 다만 몇 년을 살아도 배부르며 사람답게 떵떵거리며 사는 게 낫다."


연이는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 마음을 정했다. 신사의 미소와 따스한 음성을 생각했다. 밤낮으로 울며 했던 가슴을 찢는 듯한 엄마의 말을 저버릴 수 없었다. 연이는 온 힘을 다해 마음속 한 편의 성재 오빠를 밀어냈다. 그리고 중년 신사의 어린 아내가 되었다. 친정의 모든 빚은 청산되었고 동생들은 모두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이는 공주를 셋이나 낳았다. 그리고 숨질 때, 이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은 딸 셋을 낳은 거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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