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mily Jun 27. 2016

엄마의 뒷모습

이기적인 딸인  나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헌신이 가득하신 엄마다.

또한 학생을 특히나 우리 시절 교복을 입은 학생이면 무조건 적인 관심을 보이시던 

이제 되돌아 생각해보면 겁이 많고 준비성이 투철한 약한 마음의 소유자셨다.

엄마는 막내며느리셨다.

어린 시절 외가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시고 음성 좋은 막내 이모부 내외와 셋째 이모의 중창도 간간히 기억나고 기껏해야 고스톱이 아닌 육백  이던가? 아무튼지 가무가 이어지던 화려한 기억이 가득하다.

반면 막내이신 아빠의 친가 쪽의 모임은 시골에서  그리고 언젠가 우리 집에 잠시 계시던 친할머니와 사촌오빠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은행에 근무하시고 당시에 늦은 결혼을 하셨던 엄마는 지금의 내가 보아도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셨다..

하지만  엄마의 아이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의 내게는 어쩌면 또 다른 상처로 자리매김한지도 모른다.

촌지나 우월감으로 표현하신 학부모는 아니셨지만, 자주 학교의 여러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셨기에 우리 남매는 엄마가 학교에 보이면 숨어버리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냥 싫었다... 자주 보이는 엄마가...


워낙 욕심도 많았던 나였기에, 친구들의 또 다른 나에 대한 관심이 엄마로 인해 작용되는 것이 나에겐 상처가 돼 버렸던 기억....


엄마는 막내며느리셨다..

엄마는 충청도 당진 출신이셨다.

외할아버지의 선하신 모습이 영락없이 엄마로 이어지고,

똑 부러지는 애국 여성회장 출신 의외 할머니의 영특하심이 엄마의 자매들과 외삼촌들에게로 이어진 똑 소리 나는 형제 남매들 중의 세 번째...

어려서부터 상 딸이셨다고 한다.

상딸이란 아버지의 밥상 앞에 앉아있던 자식을 일컫는 엣 말이다.

그만큼 외할아버지의 엄마 사랑이 넘쳤던 모양이다.

엄마는 국민학교 졸업시절  친구들과의 헤어짐을 할머니 몰래 서랍에서 그 귀한 가제를 꺼내 손수건을 가득 만들어 돌리셨다고 한다..

그만큼 정이 넘치시던 분이니.. 말을 해 무엇하랴..

중학교부터 오빠 언니를 따라 서울로 상경해서 학교를 다니 던 엄마는 항상 등교시간이 일이 등을 다투는 부지런함을 보이 셨었다고 들었다.


나와 내 동생은 누굴 닮았는지 음악과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

어느 날이 던가 엄마가 말씀하셨다.

당신은 학창 시절, 음악과 미술 시간에는 선생님께 울며 매달리셨다고....


엄마와 이모 외삼촌들은 수재셨단다..

고등학교도 월반을 한 엄마는 친구분들이 다 나이가 위이시고, 큰 이모님은 6.25 전쟁 전에 서울 법대에 입학한 손꼽히는 여성들 중 하나 셨단다.

할아버지가 시골의 창고를 팔아 육법전서를 사서 건네주시던   그 시점에서 전쟁이 발발했고,, 큰 이모는 학교를 중단하고  전쟁 이후 동생들과의 생활 등등을 위해 결국 군인 아저씨와의 결혼을 선택하셨다는 어쩌면 슬픈 현실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큰 이모에게 결혼은 어쩌면 당신의 모든 꿈을 포기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중학교 시절은 해방되기 전의 아픔이 존재하고 그것이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형제들을 위한 큰 언니의 희생으로 돌아가신 큰외삼촌은 서울 공대로, 엄마는 이화여대로 진학이 가능했던 듯하다.

우리 이모들은 자존심들이 엄청 강하다..

위의 형제자매들로 서울 상경을 못한 세째이모는 국민학교 선생님을 하며 외가댁을 지켰고 막내 이모는 아래 남동생의 학자금을 들고 야반도주를 하셨었단다..

한 학기만 보내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어려웠기에 동생의 학자금을 들고.. 말이다..

그 막내 이모님은 지금 시카고에 계시다..

내 미국 시절 우연인지 필연인지 나의 든든한 엄마 역할을 해주셨다.


엄마의 자매들 중에 막내며느리는 엄마 하나셨다...

그래서 인가 실은 나는 시댁이란 존재에 대한 부정적 시점을 전혀 모르고 자랐었다.

단출한 4 식구의 가족 속에서 난 항상 북적대는 가족이 꿈이었었는지도...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항상 집에 오는 그 누구라도 빈손으로 보내는 적이 없었다

지금도 내 국민학교 동창들은 엄마의 청포도 사탕 이야길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엄마는 학습에 강한 초점을 맞추셨다.

시험 때면 우리 동네의 아이들은 우리 집 담벼락에서 멀리 떨어져야 했다.

왜냐면, 시험이라는 것에 초점을 마추시는 우리 엄마는 동네에서 노는 아이들을 이해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나이 들어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것은 엄마가 이루지 못하신 엄마의 꿈에 대한 집착이셨는지도 모르다.

그래서 엄마의 착한 딸인 나와 내 남동생은 그 당시의 문제집을 표준 동아 중앙 국민 이외에도 갱지로 만들어진 노벨 문제집까지 풀어내야만 했었다..

나에게 그것은 또 다른 상처로 자리 잡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내 엄마를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엄마에겐 그것이 자식에 대한 최선이었다는 말이다.


난 어쩌면 내 아이들에게 엄마와는 반대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랬었다..

결석이란 것을 용납지 않을 셨던 엄마와 나는 거꾸로 평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을 가버리는 엄마에 대한 만행을 저질러버렸었으니까....

헌신적인 엄마...

그러나 나는 엄마가 엄마의 시간을 가지시길 원했었다는 사실을 내가 나이 들며 깨달았다.

하지만 엄마가 자립할 시간을 어쩌면 우리 남매가 드리지 않았었는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사실 또한..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로 우리 둘은 엄마를 일거수일투족까지 챙겨버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엄마에겐 마이너스로 작용한 걸까?

아니면 원래의 엄마의 본연의 모습이었을까?

학생.... 이란 것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시는 엄마의... 모습..... 말이다.


언제부턴가 엄마께 가는 길이 내겐 슬픔이고 울음이었던 기억도 있지만 그 모든 터널을 지나 이제는 그냥 감사한다..

아빠 없이 27년을 잘 버텨내 주셔서   말이다...


일 년 넘게 고생시키던 내  발이  결국은 수술로 이어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조금은 멍한 내 모든 촉각이 주말 내내 드라마 속에서 쏟아져나오는 대사들에 내 맘을 들킨 고양이 마냥..

내 마음을 할퀴며 지나갔다.



김혜자 씨의 치매현상 속의 망각 속으로의 여행,

고두심 씨의 간암....

박혜숙 씨의 대사   ;내 자녀들을 챙기느라 내부 모를 등한시했다는 후회의....



세상 모든 자식들은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다

너무나 염치가 없으니까


나만을 먼저 걱정하는 이기주의자들이다.

드라마의 대사들

치매가 걸린 바다 같던 엄마

암에 걸린 산 같던 엄마들이 무너져버린다...


시청률 6프로를 넘어서는 드라마 한 편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이다

또 다른 주말의 드라마 속 어머니의 대사는 또 이러했다
 내 자식을 챙기느라 내 부모는 덜 챙겼었다는 후회의 대사...


나 역시 이기적이다.

내 자식들이 먼저이고 , 이젠 내가 먼저이다...


몇 년 전의 수술은 엄마께 숨기고 넘어갔었다.

그때는 미국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시댁에서 생활하던 때라.. 엄마께 자주 갈 입장도  아니라  살짝 넘어가졌었는데..

이번엔 한두 달 정도 내가 거동이 불편할듯해서  그러다 보니 엄마의 생신도 못 챙겨드릴 상황에, 얼마 전 하나뿐인 남동생의 생일도 지나쳐버려서,,

엄마와 동생과 단출히 셋의 외출,,,


하늘은 유난히 높고 맑고,,,

엄마는 인공 골반 수술 이후에 혼자 나가질 못하신 지 꽤 되셨고,,,

고기는 싫으시단다,,

열심히 가제 살을 발라드렸다..

많이도 드시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엄마의 뒷모습이 유난히  마음속 깊이 박히는 어제였다..

난 지금도 내 아이들에게 엄마의 발가락만큼도 못한다..

난 엄마처럼 헌신적이지 못하단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엄마의 하나뿐인 딸임에 틀림없다...


무슨 말을 끄적이는건지..

나 자신도 온통 뒤죽박죽이다...

요즘의 내가  이렇다..

시어른들께 수술  이야기조차 편히 전하기가 버거운 

아주 이기적인  나이다

제길헐   하늘은 왜이리 높고 맑은지 ....


작가의 이전글 에밀리의 쉐프 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