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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Jun 11. 2017

아빠에게로의 여행

추억 속의 증동리를 가다

매 년 5월 말부터 맘도 몸도 아픈지가 

그러니까 거슬러 가보면, 1991년 6월 초 갑작스레 떠나신 내 아빠,,, 때문이다.

1990년 봄 결혼하고 내가 27년을 살던 내 집의 모든 것들과의 이별, 그리고 이듬해 인 1991년,,,

1991년 그 해 내가 내려가 신혼생활을 하던 광양에 1월에 함박눈이 내렸었다.

아마도 남도에서는 자주 보지 못하는 한 겨울의 눈 풍경이 었었나 보다.

그래서 기억하기보다는 , 결혼하고 일 년이 돼가는 시점에서, 처음 임신을 알던 시간이 마침 그 눈이 가득 내리던 날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있다.

임신과 아빠는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었다.

큰 아이의 태몽을 처음 꾸어 주신 분 도 아빠셨고, 임신 전 몸이 부실할까 봐 이런저런 것들을 가득 보내 주셨던 분도 아빠였던 기억. 물론 엄마의 보살핌은 내 평생의 축복이지만..

오늘은 아빠의 이야기이니까..


아버지라 불러 볼 새도 없이 아빠는 내가 결혼 한 뒤 일 년이 지난 6월 어느 날 돌연히 가버리셨었다.

지금에 와서 누군가 내게 의아하게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리 오래 전의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냐고,,,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일찍 아버지를 여의신 분들의 입장에서는 나의 끄적거림들이 사치라고 느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내겐 남들보다 특별한 아빠와의 추억이 가득한 탓인지도...

임신 5개월이던 내가 갑작스러운 아빠의 사망 소식 앞에서 태연하고 침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이다.

내 뱃속에 그 당신 임신 5개월로 접어들던 아이가 있었던 까닭,,,

아마 그래서 몸도 정신도 반응을 한 듯한 희미한 기억이 있다.

그 아이가 지금은 한국 나이로 27살의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고 자라나면서 지 아빠를 닮은 점과 어느 순간부터 내 아버지를 닮은 부분들이 확연히 구분되어 가던 시간들...


내 아빠는 삼남 일녀 중의 막내 셨더랬다.

지금에야 입에 오를 만큼 알려진 장소이지만 , 아마도 그 시절엔 알지 못하던 남쪽 어느 작은 섬의 섬 소년이 었다는 사실을 내가 성장하며 알게 되었고, 어린 시절 가족들과 배를 타고 다시 작은 배로 갈아타던 , 파도에 작은 배가 출렁이며 무서웠던 기억이 ,,


그 작은 섬에서 홀연히 나와 목포에서 고등 시절을 보내시고 서울로 상경 , 대학을 다니시고, 저 멀리 미국까지 가서 공부와 가르치는 일을 젊은 시 절하 셨었다는 사실을 난 나중에야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것도 내가 미시간 시절 시카고의 막내 이모부를 통해서 말이다.


성실하고 가슴이 따뜻한 마음의 청년이던 아버지였으리라 짐작된다.

귀국 후 직장에서 돌아가신 큰 외삼촌을 만나셨었고  외삼촌이 많은 여동생들의 염두에 두고 아빠를 지켜보셨었다는 사실은 외숙모께 들어서 알고 있던 사실이고 , 노처녀로 콧대 높았던 직장여성 이던 내 어머니와의 만남이 주선되었었고, 엄마가 가끔 웃으며 예전에 하신 말씀 하나로 충분히 짐작이 되는 아빠의 모습이 있다.

엄마 말씀은` 네 아빠가 결혼 후 그러더라 , 선보고 결혼까지 데이트하며 먹은 식비면 집을 하나 샀다고 호호호`



어려서 망원동 시절, 이른 아침에 벨이 띵동 할 때가 있었다.

영락없이 외할아버지께서 손에 샤브레 과자를 들곤 이른 새벽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시는 풍경이었다.

또 , 사위인 아빠와 바둑을 두시며 한수 물리자고 티걱태걱하시던 풍경도,,

그래서 난 결혼하면 사위들과 장인이 다 그러는 줄 알았던 ,,,,,

그러나 내 아빠는 그럴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가버리셨다.....


어린 시절의 사진들 중에 많은 사진이 아빠와 나의 동행이다.

한 번은 천안 현충사 잔디에 미국 국기 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소녀와 코쟁이 아저씨들과 아빠가 오손도손 닭고기를 뜯어먹는 사진,

캐나다 국기 무늬의 바지 정장을 입은 안경 쓴 소녀... 등등등

또 추억 속에 명절 때면 그 귀한 양주 몇 병과 달력을 꼼꼼히 포장하시던 아빠의 등 모습,

난 지금도 아빠의 양주 포장을 잊을 수가 없다.



여행 이야기의 시작이 아빠의 추억으로 너무 길어졌다..


어쨌든 난 매년 그래서인지 5월의 후반부부터 6월의 아빠가 돌아가신 날까지.. 앓는다.


지금이야 아니지만 그래도 이십여 년 전엔 꺼려한 사실들이 있다..

내가 아니라 타인들이...

출신의 문제로 말이다.


난 충청도 당진읍 출신의 , 자매와 오빠들과 중학교부터 서울서 유학을 한 가정의 엄마와

저 남도의 작은 섬 출신인 , 남도와 서울을 거쳐 미국의 생활까지 자유롭게 멋진 시간을 가지셨던 아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지극히 시골스런 아이였다

내 본적이 종로구 연건동 198번지이긴 했었지만 말이다.

난 크면서 아빠가 사투리를 쓰시는 것을 보지 못했었고, 나 역시 다들 서울깍쟁이라 불러서 그런 줄만 알았던 시간도 있었다.


대학 입학 후 1984년 일 학년을 마치던 즈음에, 지금의 베프들인 대학 동기 둘과 셋이서 청주를 거쳐 목포를 거쳐 신안군까지 들어갔던 추억이 있다.

지금도 기억에 내 고3 시절(1982년)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가묘 (남도의 풍습 중 하나인 ) 앞에서도 사진을 찰칵했던 기억과 드넓은 염전에서의 물레방아 밟기, 명사십리라던 이어진 끝없는 맑은 모래사장..


몇 번인가 그곳을 가족과 같을 때 떠오르던 풍경은 배를 갈아타고 들어가면 마중을 나오신 조용하시던 큰 큰엉 마(난 제일 큰 큰엄마를 그리 불렀었다)와 큰큰아버지.

그리고 말없이 고구마에 김치를 얹어주시던 친할머니..

많은 나와는 나이 차이가 가득 나던 삼촌 고모 같던 사촌 오빠 언니들...


내가 결혼이란 걸 하고 나서 보니

막내며느리셨던 내 엄마는 마음 넓은도 분의 큰 어머니들의 배려로 시집살이란 것을 그다지 안 해 보신 분이 돼 버리셨다. 그 까닭에 난 어려서부터 시집은 식구가 많은 집으로 가야겠다 하는 생각을..

다들 보여 즐거운 분위기가 부러웠었나 보다.

망원동 우리 집엔 항상 외가댁 식구들이 모였던 기억은 있지만..

아마도 아빠는 마음 한 구석에 조금의 외로움이 쌓였었을지도,

그렇다고 내 엄마가 며느리의 도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큰 아버님 댁의 큰 사촌오빠도, 친할머니도 우리 집에 머무르셨던 기억도 가득하긴 하니까 말이다.


미국 생활 시절, 내 아빠는 마지막 그곳을 떠나시기 전 아마도 미대륙을 여기저기 횡단하며 여행을 하셨었나보다.

미시간 시절을 마무리하기 전 홀로 떠나는 큰 아이에게 시카고의 막내 이모부님께서 들려주신 아빠의 여행기.



얼마 전 아빠의 기일을 보내면서 문득 그 유명해진 신안의 엘도라도와 태평염전이 가고 싶었졌었다.

그래서그냥 잠시 다녀온....

내 기억이 맞다면 난 아빠의 부재 뒤에 단 한 번도 그쪽을 밟아보지 않았다.

광양. 일본 서울. 미시간을 돌면서도 말이다.

결혼 뒤 나에게 일 순위는 친정이 아니라.아니들의 본가였던 까닭도 있고,,

아니면 내 내면의 어느 부분에 선가는 아빠의 부재를 더 정확히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룻길의 여정은 아빠의 추억속으로였다.

그런데 말이다

신안군 지도면 증도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다 정확한 마을 이름이 까마득히 기억 밖으로 나가 있었던 모양이다.

생소한 다리를 건너 신안군 지도면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에 박히는 푯말...

증동리교회, 증동리 선교지......

그 증동리란 세 글자가 순간... 섬광처럼 내 가슴속의 그 증동리를 떠올린 것이었나 보다.


어느 사이 그곳은 내 기억 속의 섬. 기억 속의 작은 마을이 아닌 , 한 여전도사님의 순교지로 유명하게 자리매김이 돼 있었다,


두 해 전 겨울 아빠가 계시는 장소가 개발지로 되어 버려 더 이상 그곳에 계실 수가 없어서 , 급히 납골당으로 화장을 하고 모셨다만...

지금 문득.... 다음엔 아빠를 증동리로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을 바라보며,

잠시 엘도라의  바닷가에서 아빠를 기억하며 아빠께 부탁할 일들을 입 안에서 되뇌며...


염전이 가득한 곳을 둘러보며,,,,

그리고 싱싱한 병어 회 한 접시로

아빠를 추억하고

아빠를 그리워하며

정말  삼십 년이 넘은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병어회 속에서 씹히는 가시마저 아빠의 내음이 었나 보다.

내겐 말이다.

내 아버진 항상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항상 긴장해라,

외국어는 3개 국어는 공부해라

항상 남을 살펴라..


내가 힘들 떄, 절망할때,기쁠때.....

그 지역이 광양,센다이.서울,미시간,어디서건

난 그 말씀을 항상 되뇌었엇던 시간들이 있다.


내게 아빠는 축복이었다..지금도 여전히...

오늘은 엄마는 배재한 아빠만의 이야기를 끄적이는 중일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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