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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Oct 29. 2015

여행 이야기 (5)

오스트리아, 인스부룩 

긴 일정 중에서 잠시 방문한 오스트리아.

음악을 전공한 나에겐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는 더더우기 특별한 감정이 20년이 넘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서였나.. 아주 짧았던 여정의 모습들이 유난히 잔상에 남아 있습니다.

눈 내리는 알프스 산맥을 넘던 여정의 멋들어짐 뒤로 나타난 작은 마을. 인스부룩,,

마침 내가 태어난 해였던 1964년의 올림필 개최 지었다는 역사만으로도 뜻깊게 남겨질 내 추억 속에 도착한 날의 밤은 깊어만 갔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다시 이태리로 넘어가기 전의 잠시의 아침 산보 길의 오스트리아.

그리고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한 강한 인상은 황금지붕과 그녀가 가장 사랑한 색채인 옅은 노란색의 건물들과 더불어 펼쳐진 파스텔톤의 건물들..


마리아 테레지아

그녀는 18세기 유럽의 세력 각축 전에 서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질적인 나라들이 모여 있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있어서 그녀의 역량은 가장 뛰어났으며 , 통일성을  부여했고, 가장 유능한 지도자였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또한 그녀는 가장 인간적인 인물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740년 10월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났던 시기에 카를 6세가 생전에 막으려던 왕위 게승전쟁이 일어났고 , 그가 죽었을 때는 합스부르크의 위신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이치던 시기였기에, 천진난만한 그녀가 상속녀가 되었을 때 모든 유럽의 총리들은 놀라고 말았다는 것 역시 사실로 전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헝가리의 회의를 성공으로 거두자 그녀는 유럽에서 외교수완이 뛰어나다는 평판을 받게 된다. 결국 그녀는 남편 프란츠를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히게 된다. 여자가 황제 자리에 앉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의 성장과 교육에도 깊이  관여했지만 자녀들 때문에 많은 실망을 맛보게 된데.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후에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에 세 실제적인 충고과 설교를 퍼붓기도,실제로 경고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또 그녀의 아들 요제프와의 불화설은 끝없이 계속되었고, 요제프는 계몽주위라는 새로운 철학으로 그녀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하였든 간에, 역사를 통틀어 그녀는 여제라는 대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다음백과에서 간추림 )


그러한 여제의 색감 역시 기품 있으면서도 화려한 노란색을 선호했기에 황금지붕 등 그 당시의 건축양식을 대표하게 되었기도 하다.


잠시의 인스부룩의 노란색과 황금지붕 그리고 미색과 어울리는 파스텔톤의 건축물들이 배 경이되는 알프스 산맥의 배경과 멋들어지게 어울리던 곳.

그곳이 인스부룩이었다.

잠시 였지만, 아주 강건하면서도 따뜻한 그녀 ,

아니 여제 마리아테레지아를 만나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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